대법원이 사건 적체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추진 중인 '상고법원'에 대한 논의가 산으로 가고 있다. 법원의 한 고위 간부는 과거 자신이 근무했던 지역 변호사들과의 전화 통화에서 불필요한 발언을 해 구설수에 오르는가 하면 대한변호사협회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대한변호사협회(협회장 하창우)는 지난 10일 성명서를 내고 "전국 판사들이 변호사들에게 전화 등으로 상고법원 설치 찬성 의견을 표명해 달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하고 있다"며 "변호사들의 여론형성에 부당히 개입하는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고 비판했다.
변협은 구체적인 사례를 밝히지는 않았으나 취재결과 사건은 김찬돈 법원도서관장과 대구지역 변호사들과의 전화 통화 사실을 두고 불거졌다. 김 관장이 상고법원 설치에 찬성하는 의사를 표명해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김 관장이 지역변호사들과 통화한 사실에 덧붙어 '카더라' 소식이 더해지면서 몸이 불었다. 심지어는 김 관장이 대구지역 변호사 50여명에게 일일이 전화를 돌려 상고법원 지지를 압박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확인된 내막은 이렇다. 법원도서관과 대구지방변호사회(회장 이재동)는 지난 5일 '법률정보 공유 상호협력 협약 체결'을 대구지방변호사회에서 맺었다. 이 때 김 관장은 지역 변호사들 10여명과 안부전화를 주고 받았다. 김 관장은 통화 중 현안이 나왔고 상고법원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변호사들이 있어 설명한 것이 오해를 샀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그는 향판출신으로 법관생활 25년 대부분을 대구에서 보냈다. 지역에 아는 변호사가 많기도 했지만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다.
김 관장의 언급 자체가 적절치 않았다는 비판이 재야법조계 뿐만 아니라 법원 내부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수원지역의 한 부장판사는 "선의로 설명을 했더라도 이해관계가 서로 대립되는 상황에서 그 같은 언급을 한 것은 충분히 오해를 살 만 한 것으로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의 불똥은 엉뚱하게도 대구지역 변호사계까지 튀었다. 대구지방변호사회는 지난달 29일부터 지난 5일까지 지역 변호사들을 대상으로 상고법원에 대한 찬반 투표를 실시했다. 그런데 김 관장의 전화 통화와 변협의 성명이 이 시기와 겹치면서 지역변호사들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비쳤다는 것이다.
대구지역 변호사들이 만든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11일 "대구 변호사들이 까였다"는 글을 비롯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며 지역 변호사들을 모욕했다는 성토의 글이 이어지고 있다. 대구지역의 한 변호사는 "지금이 어떤 세상이냐. 현직 지역 부장판사라고 해도 사건 끝나면 안 보는 세상"이라며 "전화 한 통으로 변호사들이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보는 발상 자체가 의심스럽다"고 밝혔다.
또 다른 변호사는 "대구는 지역이 좁아서 그런 일이 있다면 삽시간에 돈다"며 "그러나 상고법원 지지압박 전화를 받았다는 의혹제기는 보도를 보고 처음 알았다. 아직도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모르고 있는 변호사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대구지역의 한 중견 변호사는 "설령 김 관장이나 다른 판사들로부터 그런 전화를 받았다고 치더라도 요청에 응할 이유가 없을뿐더러 비밀투표로 설문조사를 하는데 찬성을 했는지 반대를 했는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겠느냐"며 "무엇보다도 지역 변호사들은 상고법원에 관심이 없다"고 까지 했다.
이번 대구지역 변호사들을 대상으로 한 상고법원 찬반 투표는 143명 중 104명이 찬성해 70% 이상의 찬성률을 보였다. 대구지역 변호사 인원은 총 523명으로, 대구변호사회 관계자는 이번 투표율이 상당히 높았다고 말했다.
대한변협이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가운데 지방변호사회간 상고법원에 대한 찬성과 지지가 엇갈리고 있는 것도 주목되는 부분이다. 전국 변호사 중 70% 이상이 소속된 서울변호사회(회장 김한규)에 이어 인천변호사회(회장 최재호)도 공식적으로 찬성입장을 표명했다. 반면 부산·울산·경남변호사회는 반대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다만 대구변호사회는 투표참여자가 4분의 1에 불과해 설문조사 결과가 대표성을 갖는다고 보기 어려워 공식입장은 보류하고 설문조사 결과만 발표한 상태다.
대한변협은 지난 5월 서울변호사회의 지지표명과 부산·울산·경남변호사회의 반대로 지방변호사회간 의견이 엇갈리면서 6월 중 지방변호사회장 회의를 열고 의견을 청취한 다음 뜻을 같이 하는 변호사회와 입장을 표명할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입장을 표명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한편, 상고법원 도입에 대한 또 한쪽의 이해당사자인 검찰의 한 고위 관계자는 "충분한 공론화와 치열한 공개 토의가 없는 상황에서 상고법원 도입이 국민들에게 대법원과 변협간 세 다툼으로 비쳐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최기철 기자 lawch@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