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5일 오전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국제의료기기·병원설비 전시회(KIMES 2015)'에서 참관객들이 디지털 엑스레이 VIDIX Ⅱ를 살펴보고 있다. / 사진 뉴시스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 사용’ 문제를 두고 의사와 한의사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전국적인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확산의 여파로 이달 말 예정된 ‘한의사 현대의료기기 허용범위’에 대한 복지부의 가이드라인 발표는 잠정 연기됐지만, 양측은 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2000년대 이전에 의사와 한의사는 각자의 영역에서 안정적으로 환자를 진료해왔으나 의료시장이 포화 상태가 되면서 서로의 영역을 지키는 데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 과정에서 자존심 싸움이 '법적 다툼'으로 격화되고 있다. 국민의 건강과 직결되는 한의사의 현대 의료기기 사용 문제를 두고 양측의 주장을 짚어본다. (편집자주)
지난 2월1일 서울 강서구 가양동 대한한의사협회에서 열린 ‘긴급 임시대의원총회’에서 한의사들이 엑스레이, 초음파 등 현대의료기기 허용을 촉구하는 문구가 적힌 어깨띠를 메고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 사진 뉴시스
"치료법 다르다고 진단까지 차별 안돼"
“현대 의료기기 사용을 허하라”는 한의사들의 목소리는 2013년 12월 즈음부터 더 높아졌다. 헌법재판소가 안압측정기 등을 사용한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한의사 2명이 ‘기소유예 처분을 취소해달라’고 낸 청구에서 한의사들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헌재는 “해당 의료기기를 사용해 환자들을 진단하거나 이를 토대로 한약처방을 한 것은 의료법상의 정당한 의료행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안압측정기, 자동안굴절검사기, 자동시야측정장비, 청력검사기, 세극등현미경 등 기기는 측정 결과가 자동 추출되기 때문에 전문적인 식견이 필요없고 환자의 신체에 위해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이후 지난해 12월 정부가 보건의료 분야 ‘규제 기요틴’을 발표하며 한의사 현대 의료기기 사용 및 보험 적용 확대 관련 내용을 포함하자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복지부도 헌재의 결정에 근거해 한의사 의료기기 사용 범위를 검토 중이다. 물론 정부가 이와 관련 법이나 시행령 등을 고치지 않는 '비법령'으로 분류하고 법원과 헌재의 판례를 따르겠다는 방침을 밝혀 급진적인 허용 결과가 나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대한한의사협회(회장 김필건)의 주장과 헌재의 해당 결정은 ‘치료’와 ‘진단’을 구분해서 보고 있다. 의사와 한의사는 ‘치료’의 방법이 다른 것이지 ‘진단’에서부터 차별을 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의사협회 김태호 기획이사는 “‘진단’은 환자의 질환에 대해 객관적인 정보를 얻는 과정이고 이는 한의학적 또는 양의학적 원리로 나눠지는 것이 아니다”며 “환자에 대한 정보를 기기를 통해 명확하게 알 수 있다면 더 나은 의료서비스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영석 한의사협회 부회장도 “도구 사용 자체를 막는 것은 한의학을 400년 전의 학문으로 머물게 해 고사시키려는 것”이라며 “새로운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면서 현대한의학으로 발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의협은 또 “의료법상 한의사가 의료기기를 사용해선 안 된다는 조항은 없다”고 지적한다. 한의협 관계자는 “보건부 복지령의 ‘진단용 방사선 발생장치의 안전관리에 관한 규칙’에 안전관리자책임자의 자격기준에 영상의학과 전문의, 의사, 치과의사, 실무경력 3년 이상의 방사선사 등은 있는데 한의사는 빠져있어 과도한 제한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의대도 6년간 동등 교육"
그렇다면 정확히 어떤 의료기기까지 한의사가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일까. 한의사협회의 공식입장은 대표적인 진단기기인 ‘엑스레이와 초음파’의 사용을 허가하라는 것이다. 한의협 관계자는 “이 기기들은 의과대학 6년을 졸업하면 쓸 수 있 것이고, 한의학과에서도 6년간 동등한 교육을 받기 때문에 충분히 사용 가능하다”고 말했다. 다만, CT와 MRI 사용에 대해서는 한의협에서도 영상의학과 전문의들의 분야라고 인정하고 있다.
한의협에서 드는 또 하나의 근거는 ‘의료비 절감과 편의성’이다. 예컨대 발목을 다쳐 한의원에 온 환자가 엑스레이 촬영을 위해서는 병원에 갔다가 다시 와야 하는데, 한의원에서 바로 엑스레이를 찍을 수 있게 되면 중복진료비 등이 빠지면서 총 비용의 30% 정도가 감소한다는 것이다. 한 한의사는 “병원에서만 염좌 치료를 받으라는 주장은 환자들의 선택권을 제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기준으로 발목, 목, 요추·골반 부위 등을 삐어 한의원을 방문하는 환자는 연간 360만여명으로 추산된다. 또 한의협과 중소상공인연대는 "한의사가 의료기기를 사용할 경우 5년 안에 1조원의 추가 내수 시장이 창출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끊이지 않는 법률분쟁…'영문 명칭' 놓고 다투기도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서 형사 고소·고발도 끊이질 않고 있다. 한의협은 지난 3월 유용상 의협 한방특별대책위원회 위원장이 지난해 초 인터넷 사이트에 ‘침술 미신에 일침을 놓을 때가 됐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광고를 게재한 것에 대해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또 협회와 한의사 151명은 충북대 한정호 교수에 대해서도 명예훼손과 모욕 혐의로 고소했다. 한 교수는 올해 초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우리는 한의사처럼 초능력이 없어서 기나 음양오행으로 사람의 내부를 볼 수 없다"는 발언을 했다.
이 뿐만 아니라 의협 비대위가 일간지에 게재한 광고에 대해서도 한의협은 명예를 훼손했다며 의협 비대위원장이었던 김주형 전라북도의사회장 등 4명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해당 광고는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 사용은 무자격자의 무면허 의료행위이며 자신의 이익을 목적으로 국민 건강에 위해를 가하는 무면허 의료인은 사라져야 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한의협은 한의사를 모욕하는 발언을 하는 의사에 대한 고소·고발을 이어간다는 방침이다.
한의사협회는 최근 '영문명칭'을 두고 벌인 의협과의 법적 다툼에서 이기기도 했다. 한의협이 그동안 써오던 조직의 영문 명칭 ‘The Association of Korean Oriental Medicine’에서 ‘Oriental’(동양)을 빼기로 하자 의협은 자신들의 영문 명칭 ‘Korean Medical Association’과 혼동될 우려가 있다며 사용금지 소송을 냈다. 이에 대해 서울남부지법 민사11부(재판장 염기창)는 한의협의 손을 들어줬다.
대한의사협회가 지난1월20일 서울 이촌동 의사협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추무진 회장이 '국민건강보호와 의료영리화 저지를 위한 단식투쟁 선언문'을 읽고 있다. / 사진 뉴시스
"진단과 치료 달리 생각하는 것은 위험"
대한의사협회(회장 추무진)의 주장은 ‘치료’와 ‘진단’은 뗄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치료로 이어질 수 있어야 진단에 의미가 있고, 치료 뿐 아니라 진단도 중요한 의료행위라는 것이다. 조정훈 의협 한방대책특위 위원은 “엑스레이와 초음파로 진단하는 것도 단순한 관찰행위가 아닌 의료행위이며 이를 단순히 따로 분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의협은 헌법재판소가 안압측정기 등의 사용을 한의사에게 허가한 결정은 의학적인 식견 없이 법리적으로만 판단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헌재의 결정에 따른다면 만약 ‘녹내장 의심’ 환자가 한의원에서 안압측정만 받고 정상으로 판명돼 방치된다면 적절한 치료시기를 놓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안과의사회는 “국내 녹내장 환자의 40~50%를 차지하는 '정상안압 녹내장'의 경우 정상 안압에도 실명을 초래할 수 있다"며 "이를 진단하려면 안압과 시야측정 뿐 아니라 안저 검사, OCT 검사 등의 전문적인 검사가 추가로 필요해 안압만으로 녹내장 여부를 확진하면 오진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설사 헌재의 결정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의협은 ‘보건위생상에 위해가 없고 전문적인 식견이 필요 없으면서 한의과 대학 교육과정에 있는 기계에 대해 사용할 수 있다는 판례’일 뿐 한의사들의 엑스레이 및 초음파 사용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헌재 관계자는 "양론이 모두 가능한 상황“면서도 "기소유예 처분의 취소 결정은 법원 판결이 아닌 그 전단계인 검찰의 처분에 대한 결정이기 때문에 법원 판결과 무게가 같을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결정문에 소상히 반영되지는 못했으나 당시 청구인 한의사는 해당 의료기기의 사용 관련해 의료법령 민원질의와 회신사례집 내용을 포함해 굉장한 공부와 연구를 한 분이었기 때문에 의료법 위반으로 처벌하기는 심하다고 본 것”이라고 말했다. 즉, 당시 헌재의 결정은 한 개인의 처벌에 대한 것으로 한의사 의료기기 사용 전반에 관한 판단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의료법상 한의사의 의료기기 사용을 금지하는 조항은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의협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없는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전문의도 엑스레이 판독 어려워"
특히 의협은 단순한 밥그릇 싸움이 아닌 '환자 안전의 문제'라는 점을 강조한다. 한의과대학의 교육이 현대 의료기기를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하지 않다는 것. 한 의사는 “영상의학 교육의 깊이 뿐 아니라 수련, 임상실습과정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단순히 배우는 과목이 겹친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라고 지적했다.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한 영상의학과 전공의는 “추간판탈출증(일명 '디스크')은 엑스레이로는 판단하기 힘들고 MRI로 진단해야 한다는 것은 의사들 사이에서 기본 상식인데, 한방에서 엑스레이를 넘기면서 추간판탈출증을 봐달라고 요청해 황당한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의사도 “엑스레이는 전문의가 판독할 때도 영상의학과가 아니라면 어려운 경우가 많다”라며 “완전히 다른 수련과정을 거치는 데 의학적인 근거나 데이터 없이 무조건 허용해달라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현재까지 우리 법원과 헌재는 잡티 등 피부질환 치료 광선조사기 IPL(Intense Pulse Light)이나 CT, 초음파 골밀도 측정기 ‘OsteoImager PLUS' 등 현대 의료기기를 사용한 한의사들에게 일관되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있다. 헌재는초음파 골밀도 측정기 관련 결정에서 “한의학과 서양의학은 학문적 기초가 달라 학습과 임상이 전혀 다른 체계를 통해 진행되기 때문에 훈련되지 않은 분야의 의료행위는 무면허 행위와 같다”고 판단했다. 한편 법원과 헌재는 ‘IMS(근육내 자극치료)'라는 침술을 환자에게 시행한 의사에게 의료법 위반이라는 판단을 내리기도 했다.
지난 3월 세계의사회 자비에 도(Xavier Deau) 회장과 무케시 하이커왈(Mukesh Haikerwal) 이사회 의장는 “한의사에게 현대의료기기 사용을 허가하려는 한국 정부의 계획은 보건의료 비용을 증가시키고 환자 안전에 위험을 초래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들은 “엑스레이나 CT 스캔의 지침은 전통의학에서 존재하기 않고 방사선을 안전하게 사용하거나 방사선을 이용한 결과를 해석하는 교육도 받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한의원 엑스레이 보유, 2500억 지출"
‘한의사에게 현대의료기기를 허가하면 환자 의료비가 줄어든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의사들은 “발목을 다쳤을 때 한의원에 가야한다는 전제부터 틀렸다”고 반박한다. 발목이 아플 때 애초에 병원으로 오면 엑스레이 촬영부터 치료까지 한 번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조정훈 의협 한방대책특위 위원은 “만약 한의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골절이 나왔다면 어차피 다시 병원에 와야한다”고 지적했다. 또 조 의원은 “전국 한의원이 약 8000대의 엑스레이를 보유하게 되는 것으로 추산할 때 건강보험에서 2500억원 정도가 더 지출해야 해서 국민들의 보험료 부담이 가중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의협의 법적 조치에 대해 의협도 강력한 맞대응을 하고 있다. 최대집 국민건강국민연합 상임대표는 지난달 김필건 한의사협회장을 무고죄로 맞고소 했다. 한의협은 앞서 국민건강연합이 강남구 아파트 단지 일대에 “한의사가 초음파를 보고 다낭성낭종이 있다는 거짓진단을 내린 후 수백만원에 달하는 한약을 권유했다”는 광고를 내 한의사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최 대표를 고발했다. 추무진 의협 회장은 정부에 대해 한의사의 의료기기 사용을 허용할 경우 대규모 장외집회도 불사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조승희 기자 beyond@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