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손효주기자] 최근 국내 주요 건설사들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정유공장 프로젝트를 대거 수주하면서, 제 3의 중동 건설붐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국내 정유업계의 고사위기'라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가 직접 석유제품에 나설 경우, 우리 업체들이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는 우려다. 수출 비중이 높은 우리 정유산업의 특성상, 뻔히 예고된 '위기'에도 이렇다할 대응전략을 짜기가 쉽지 않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산유국의 제품생산 가세로 벼랑끝 위기에 몰린 정유산업의 문제점과 활로 등을 3차례에 걸쳐 짚어본다. <편집자>
최근 글로벌 경기침체로 위기상황에 몰려 있던 국내 건설업계에 낭보가 날아들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영 석유회사인 아람코와 다국적 기업 토탈이 발주한 23억달러 규모 사우디 주베일 정유공장 프로젝트를 국내 주요 건설사들이 수주한 것이다.
유럽의 경쟁 업체들을 제치고 수주에 성공한 이 프로젝트는 하루 40만배럴의 원유를 정제할 수 있는 정유시설과 여기서 만들어진 석유제품을 곧바로 수출할 수 있는 항만시설을 함께 만드는 대규모 공사로 '제 3의 중동 건설붐'을 불러올 것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다.
그러나 '낭보'는 단지 건설업계의 일. '주베일 프로젝트 본격화'는 국내 정유업계로서는 '사망선고'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만큼 중대한 위기다.
원유를 수출하기만 하던 산유국들이 자체 정유공장을 만들어 고부가가치 석유제품을 만들어 수출하기 시작하면, 세계 최고의 정제시설을 자랑하며 매년 국내 수출액 순위 최상위권을 기록하던 대표적 효자 수출품목인 석유제품을 만들던 국내 업체들이 더 이상 설 자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석유제품의 최대 소비처로 떠오르고 있는 인도는 이미 올초 하루 58만배럴 정제능력을 갖춘 릴라이언스 설비 가동을 시작했다. 중국의 해양석유총공사(CNOOC)가 만든 하루 10만배럴 규모 정유시설도 본격 가동을 코앞에 두고 있다.
수출 비중이 60%에 이르는 국내 정유업계로서는 '업친데 덮친 격'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업계 한쪽에서는 "이제 정유업을 접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온다.
◇ "대책이 없다"
세계 정유산업의 지각변동 속에서 우리 업체들이 더욱 위기에 몰리는 이유는 수익구조가 지나치게 수출에 쏠려있다는 점이다.
현재 국내 정유 4사의 수출 비중은 내수 판매 대비 60%를 넘어선다. 수출길이 막히면 경영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인 셈이다.
그러나 산유국들이 정유공장을 만들어 석유제품을 직접 만들게 되면, 원유생산지에서 바로 제품을 가공할 수 있어 1차적인 수송비용을 줄일 수 있고, 이렇게 줄어든 비용은 제품가격을 내릴 수 있는 요인이 된다. 원유를 수입해 다시 제품을 수출하면서 이중으로 운송비를 지불해야 하는 우리 업체들로서는 가격경쟁을 할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것이다.
이런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산유국의 석유제품이 우리의 주요 수출국인 중국, 싱가포르 등 시장에 뛰어들게 되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정유산업은 한번 만든 장치를 끊임없이 가동시킬 수 밖에 없는 대표적 장치산업이다. 시설을 폐쇄하지 않는 한 계속 가동시켜 석유제품을 일정분 이상 생산해야만 한다.
그런데 국내 시장이 협소해 생산분을 모두 소화할 수 없는 우리 업체들이 수출길마저 막히면, 결국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된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석유제품 수출사업은 기본적으로 운송비가 많이 들어 가까운 지역을 타겟으로하는 '로컬 비즈니스'사업"이라며, "따라서 중동 국가들이 제품생산에 나설 경우 같은 아시아권인 중국, 인도 등 신흥시장을 수출선으로서 노릴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기술력을 앞세워 품질로 경쟁할 수 있다"는 반론도 있지만, 사정이 그리 녹록한 것은 아니다.
윤여중 LG경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중동 등지에서 가동 중이거나 짓고 있는 정유공장의 경우 세계 유수 건설사들의 고도화 설비를 플랜트 그대로 수출한 경우가 많다"며 "같은 설비에서는 당연히 유사한 품질의 석유제품이 나오기 때문에 산유국에서 만들어낸 제품과 우리 제품의 품질에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 "공급 느는만큼 수요 늘것" 낙관론도
그러나 공급이 증가하는만큼 수요도 늘어나기 때문에 너무 비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의견도 있다.
주베일 프로젝트는 2013년 완성될 예정이지만, 중국 인도를 비롯한 신흥국의 제품 수요는 올해 말이나 내년 초 저점을 찍고 폭발적으로 늘어날 전망이어서, 공급 과잉이 상쇄되고 국내 업체들의 현재 수출선이 유지될 것이라는 얘기다.
산유국들이 우리 수출국인 아시아쪽 보다 거리상으로 가까운 유럽지역을 주요 수출국으로 택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백영찬 SK증권 정유·화학 기업분석팀 과장은 "중동은 아시아로 구분되지만 실상 유럽에 더 가까운 지리적 특성이 있다"며 "무거운 석유제품의 특성상 중동 정유공장들이 운송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지리적으로 가까운 유럽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고, 그러면 우리 업체들과 수출선이 겹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백 과장은 또 "우리 정유기업의 경우 최대 40년전에 정제시설을 건설한 경우가 많아, 이미 시설 건설에 따른 간접 비용이 제품 가격에 반영되지 않는다"며 "그러나 산유국들은 설비 투자비용을 제품가격에 반영하지 않을 수 없어, 우리의 운송비 부담이 상쇄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뉴스토마토 손효주 기자 karmare@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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