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사무 변경으로 인한 자존심 손상과 상사와의 마찰, 업무 중 당한 심한 모욕감과 수치심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근로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우울증 병력이 없었고 개인적 성격이 자살을 결심하는 데 일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었다 하더라도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1부(주심 고영한 대법관)는 업무상 스트레스로 객실에서 목을 매 숨진 콘도 객실팀장 이모씨의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 결정처분 취소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고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원고승소 취지로 사건을 대구고법으로 되돌려 보냈다고 14일 밝혔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씨는 입사 후 오랫동안 관리업무를 해오다가 총무과장으로 승진했으나 4개월 만에 사무실이나 부서원이 없는 직책으로 발령받아 자신보다 직급이 낮은 대리가 팀장인 객실팀에 소속됐으며, 상사의 지시에 따라 객실 내 전화기에 붙은 스티커 제거 등 잡다한 업무를 직접 처리하면서 자존심이 많이 상한 상태에서 직속 상사와 업무 마찰로 심한 스트레스와 정신적 고통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또 “이씨는 그렇게 1년 2개월을 근무하면서 스트레스가 누적돼 수면장애, 불안, 활력 감소 등 증상을 보였고 동료들에게 자신의 사정을 호소하기도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프론트로 고객 대응 지원업무를 나갔다가 콘도회원으로부터 심한 욕설과 모욕적인 말을 듣고 모욕감과 수치심으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점 또한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같은 사정을 종합해보면 이씨는 갑작스러운 담당사무의 변경과 그로 인한 자존심 손상, 상사와의 마찰, 심한 모욕감과 수치심을 유발하는 사건에 직면해 극심한 업무상 스트레스를 받아 급격히 우울증세를 유발했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자살한 것”이라며 “이씨에게 우울증 병력이 없다거나 성격 등 개인적 취약성이 자살을 결심하게 된 데 일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달리 볼 것은 아니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그럼에도 이씨가 자살에 이르게 된 경위와 동기 등을 좀 더 면밀히 따져보지 않고 이씨의 업무 내용과 업무시간이 비슷한 경력의 동종업무 종사자들보다 과도해 극심한 우울증을 초래할 정도로 보기 어렵고, 업무상 스트레스도 사회평균인 입장에서 도저히 감수하거나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원심은 위법하다”고 지적했다.
이씨는 1995년 1월 경주에 있는 한 콘도에 입사해 관리부서에서만 일해오다가 2009년 1월 총무과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그 전 콘도가 경영난으로 다른 회사에 인수된 뒤 본사에서 부임한 부총지배인이 업무를 총괄하면서 그와 갈등이 생겼고 승진한 지 4개월 뒤 객실 인스펙터팀장으로 발령 받았다. 객실팀은 편제상 자기보다 직급이 낮은 대리가 팀장이었고 그 산하 인스펙터팀은 사무실이나 책상, 부서원이 없었다.
이후 이씨는 콘도 내 전기실이나 기계실, 주방 등을 옮겨다니면서 근무했고 본래 업무는 500개가 넘는 객실을 유지·관리하는 것이었지만 부총지배인이 지시한 객실 내 전화기에 붙은 스티커 제거, 에어컨 점검, 프론트 고객 대응업무 등이었다. 게다가 부총지배인은 “지금 어디 있어요”, “지시한 일은 잘하고 있지요”, “그 일을 그만큼 오래 걸려요”라는 등 이씨의 근무 상태를 수시로 체크했다.
그러던 중 2010년 8월 이씨는 프론트 지원업무를 나갔다가 방 배정에 불만을 품은 콘도회원으로부터 심한 질책과 욕설, 모욕적인 말을 듣고 휴가를 낸 뒤 퇴근했다가 당일 밤 늦게 객실로 몰래 들어가 가스배관에 넥타이를 걸어 목을 매 목숨을 끊었다.
이씨의 유족은 “업무상 스트레스와 정신적 고통으로 사망한 것”이라며 유족급여와 장의비 지급을 청구했으나 근로복지공단이 “생명과 바꿀 수 있을 정도의 불가항력적 스트레스 상태가 원인이 됐다고 볼 수 없다”며 거부하자 유족이 소송을 냈다.
그러나 1, 2심은 비슷한 경력의 동종업무 근로자에 비해 업무가 과중하다고 볼 수 없고 상사와의 갈등도 업무상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가끔 언성이 높아진 것에 불과한 점, 꼼꼼하고 예민한 이씨의 개인적 성격이 자살 결심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있는 점 등을 이유로 유족의 청구를 기각했다. 이에 유족이 상고했다.
대법원 청사. 사진/뉴스토마토
최기철 기자 lawch@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