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억만장자 중 상속으로 부를 일군 사람의 비율이 전세계 78개국 중 6번째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세계 흐름과는 역행되는 현상으로, 우리사회에 만연한 부의 대물림을 여실히 보여주는 지표다.
미국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가 최근 발간한 '슈퍼리치의 근원: 억만장자의 성향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자산 10억달러(약 1조2000억원) 이상 보유자 중 74.1%가 '상속형(inherited) 부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전세계 평균치인 30.4%는 물론 중국(2%), 일본(18.5%), 미국(28.9%), 프랑스(51.2%) 보다도 높은 수준이다.
한국보다 상속형 부자 비율이 높은 곳은 아랍에미리트(75%), 아르헨티나(80%), 덴마크(83.3%), 핀란드(100%), 쿠웨이트(100%) 정도였다. 다만 이들 국가의 억만장자 비율은 전체의 0.2~0.4%에 불과해 1%가 넘는 국가 중에서는 한국의 상속 비율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조사는 PIIE가 1996년부터 2015년까지 20년에 걸친 포브스의 억만장자 리스트를 기반으로 분석했다. PIIE는 보고서를 통해 "전세계의 평균 소득 증가율은 둔화되고 있지만 막대한 부를 축적한 사람의 수는 매우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고 진단했다. 2015년 말 기준 전세계 억만장자 수는 1826명으로 집계됐다. 사상 최대 규모다.
주목할 만한 점은 선진국보다 신흥국에서 억만장자의 수가 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천연자원이나 정치적 연줄을 기반으로 부를 축적했던 과거와 달리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IT 분야에서 새로운 사업 기회를 포착한 부호가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와 무관치 않다. 40세 이하의 젊은 부호·자수성가형 부호·여성 부호 등이 크게 늘어난 것도 같은 맥락이다.
PIIE에 따르면 자수성가형(self-made) 부호의 비율은 1996년 44.7%에서 2001년 58.1%, 2014년 69.6%로 꾸준하게 늘었다. 반대로 상속형 부호는 1996년 55.3%에서 2014년 30.4%로 줄었다.
전세계 억만장자들의 부의 원천 비율 변화. 자료/PIIE
이는 선진국과 신흥국을 가리지 않는 보편적 추세였다. 미국과 유럽 등을 포함한 선진국에서 자수성가 부호의 비율은 2001년 56.4%에서 2014년 79.1%로 늘었다. 같은 기간 신흥국에서는 58.4%에서 62.7%로 증가했다.
국가별로는 가장 많은 억만장자가 살고 있는 미국에서의 자수성가 비율이 71.1%로 나타났다. 창업(32%)과 금융 분야(26.8%)를 통한 부의 축적이 비슷했다. 대표적 인물로는 마크 주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등이 있다.
최근 10년 사이 억만장자의 수가 2명에서 213명으로 폭증한 중국에서는 자수성가형 비율이 무려 98%에 달했다. 이중 절반 가까이가 창업을 통해 부를 쌓았다. 리옌훙 바이두 창업자, 마윈 알리바바 창업자 등이 대표적이다.
포브스 선정 3년 연속 세계 최대 부호에 이름을 올린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는 대표적인 자수성가형 부자다. 사진/뉴시스·AP
반면 한국은 자수성가형 부자 비율이 25.9%에 그쳤다. 지난 20년간 억만장자 수는 7명에서 30명으로 늘었지만 자신의 힘으로 부를 일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비롯해 홍라희 리움미술관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삼성가의 억만장자들만 해도 모두 상속형 부호로 분류된다. 삼성을 비롯해 재벌가는 물론 중소기업, 일반 시민까지 부의 규모와 상관없이 상속을 당연시하는 기류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와 자본시장 미성숙, 안정적 직장을 선호하는 분위기 등이 종합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권오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제정책팀장은 "한국은 선진국보다 세금을 비롯한 각종 규제의 틀이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재벌들의 부의 대물림을 끊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개인이 새로운 시장에 진출하려 해도 독과점 구도가 형성돼 있는 곳이 적지 않는 등 진입장벽도 높은 편"이라고 진단했다. 자수성가형 부자가 나오기에는 제반 환경이 비교적 척박하다는 설명이다. PIIE 역시 "한국의 부호들은 과거 산업화를 통해 경제가 급속 발전하던 때와 무관치 않다"고 평했다.
김진양 기자 jinyangkim@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