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300개가 넘는 상장사들이 일제히 주주총회를 개최했다. 지난 몇 년간 극심한 경기침체가 이어진 탓에 기업들의 실적이 악화됐고, 주주들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클 것으로 예견됐다. 업황이 어려운 기업들은 성난 주주들을 달래기 위해 진땀을 흘리는 곳도 있었다.
하지만, 올해도 대부분 주총 현장에선 미리 준비된 시나리오에 따라 모든 안건이 20~30분만에 속전속결로 통과됐다. 간혹 소액주주가 주총 도중 거수를 통해 안건에 대한 반대의견을 개진하려 치면 미리 심어놓은 회사 직원들이 나서 훼방을 놓거나, 아예 무시해버리기 일쑤다. 한 대기업 주총 현장에선 큰 손실을 봤다는 소액주주가 임직원이 실적개선을 위해 앞장서야 하지만, 이사 보수한도가 수십 억원에 달한다며 보수를 제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주주들의 박수를 쏟아졌지만, 별도의 다수결 의견을 물어보는 절차 없이 넘어가 버렸다.
또 원안에 반대하는 의견은 발언시간 제한 등으로 발언권을 막거나, 시간 허비 등을 이유로 안건에 대한 설명 없이 넘어가는 경우가 다반사다. 당장 시끄럽지 않게 하려고, 주총 일정을 일시에 몰아서 개최하고 이마저도 형식적으로 치르는 게 지난 몇 년간 봐온 주주총회의 모습이다.
주주총회는 주식회사의 주주들이 모여 상법에 정해 놓은 회사의 중요한 사안을 정하는 ‘최고 의결결정회의’이다. 형식적인 이벤트쯤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는 얘기다. 투자자는 주총을 통해 기업의 실적악화로 인한 손실, 분식회계, 오너의 배임 및 횡령 등 기업이나 경영자의 문제점들을 올바르게 지적하고 감시함으로써 투자자의 이익과 권익을 보장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 그런데 대부분 기업들은 주총을 매년 3월이 되면 열리는 하찮은 행사쯤으로 여기며, 그 의미와 취지를 살리지 못하는 듯하다. 주주 입장에서도 기업에 대한 오해와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다.
세계 최고의 갑부 중 하나인 워런 버핏(Warren Buffett)의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총회는 매년 봄 미국 중부의 작은 도시인 오마하에서 열린다. 기업 임원부터 농부, 랍비에 이르기까지 수만 명의 주주들이 참여해 2박3일 동안 진행되고, 버핏은 주주들의 다양한 질문에 정성껏 답변한다. 또 여러 문화행사 등도 함께 진행해 마치 축제의 장이 되기도 한다. 버핏의 명성이 커지기 시작한 1970년대부터 버크셔의 주총 분위기는 40년간 한결같다. 미국의 다른 기업들도 주총을 통해 기업과 투자자가 소통하는 장으로 활용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버크셔 해서웨이의 주총을 벤치마킹해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주주총회를 개최하는 기업이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풀무원은 지난 2008년부터 미술관에서 주주총회를 열고, 영업실적 보고에 이어 토론회, 퀴즈쇼, 사회공헌활동(CSR) 등 주주와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의 주총 문화는 더는 부담스럽거나, 곤혹스러운 통과의례가 아닌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설득할 건 설득해 기업과 주주가 소통·상생할 수 있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해 보인다.
김영택 산업2부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