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16년 9월 9일 오전 4시경.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빌라에는 불길이 무섭게 번지고 있었다. 빌라 4층에 살던 한 청년은 화재임을 알고는 119에 신고하고 건물 밖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는 불타고 있는 건물로 다시 뛰어 들어가 이웃들의 잠을 깨웠다. 매캐한 연기를 헤치고 불길을 뚫고 층층마다 초인종을 눌렀다. 사람들을 대피시켰다. 그렇게 세 번이나 같은 행동을 되풀이한 결과, 같은 빌라에 사는 20가구의 주민들은 화마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유독가스에 질식해 의식을 잃었고, 이후 열흘간 죽음의 문턱에서 사경을 헤매다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고 안치범 씨다. 그의 나이 28세 때였다. 이기주의가 횡행하는 이 사회에 그는 우리에게 진정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각인시켜 주고 간 의인이었다. 그가 울린 초인종 소리는 지금도 모든 이의 가슴에 울려 퍼지고 있는 듯하다.
#2.서울 동숭동에 사는 황화익 씨(76세)는 30여 년간 빈병과 폐품을 모아 따뜻한 손길이 필요한 이웃을 도우며 살아가고 있는 분이다. 그야말로 폐지 줍는 할머니다. 어찌 보면 그녀는 그다지 재산도 없고, 남편도 떠난 방에서 홀로 지내는 쓸쓸한 노인의 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삶을 봉사로 점철한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분이다. 그 마음은 이웃을 녹이고 이 사회를 녹이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자신이 행해온 봉사의 기록을 몇 십 권의 수첩에 빼곡하게 기록해놓기도 했는데, 그 수첩은 어쩌면 자신의 삶을 지탱해준 생명수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수첩은 비록 낡고 오래된 것이지만, 앞으로 이 사회가 영원히 갖고 가야 할 중요한 유산이 되어야 할 것이다.
#3. 2016년 12월 10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화배우 김보성 씨가 로드 FC경기에서 일본의 파이터 콘도 테츠오와 이종격투기를 벌이고 있었다. 비록 그는 경기에서 오른쪽 눈이 함몰되는 부상을 입었지만, 경기 후의 인터뷰에서, “만약 ‘안면 재건 수술’이 잘못되면 오른쪽 시신경마저 손상돼 오른쪽 눈까지 안 보이게 될 우려가 있다”며 수술 포기 사연을 전하고 있었다. 그는 현재 왼쪽 눈의 시력이 거의 없어 ‘시각장애 6등급’을 받은 사람이다. 무엇보다, 그의 경기가 사람들의 가슴에 다시금 새겨지는 이유는, “힘들어도 우리 소아암 어린이들을 돕는다는 생각을 하니까 없던 힘까지 생긴다. 소아암 어린이들을 위해서라면 제 몸이 조금 찢어지고 아파도 견딜 수 있다”는 그의 각오가 감동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이 무모한 도전으로 그가 평소에 던지는 화두인 ‘의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답게 세상을 덮고 있었다.
작년에 있었던 가슴 뭉클한 사연을 구체적으로 사례를 들어 소개해 보았다. 어찌 이 세 가지 사례뿐이겠는가. 2016년에는 우리 사회를 아름답게 만든 미담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자신이 고령이고 지체 장애인이면서도 지난 10여 년간 장애인의 이동 편의 증진과 안전을 위해 헌신한 경봉식(76세) 씨 등, 참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이웃과 불우한 사람들을 돕는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다. 특히 이름을 밝히지 않고 선행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여러 검색 사이트를 찾는 내내 필자의 가슴이 뜨거웠고 뭉클했다. 이웃을 내 가족처럼 배려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진정한 힘이고 참모습이다. 대한민국은 바로 이런 곳이다.
비록 지난 병신년은 이런저런 눈살 찌푸리는 일들로 우리의 삶이 고단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 사회에 뿌리 내린 공동체 의식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위안을 삼아야 한다. 2017년 정유년에는 사람이 아름다운 이야기와 세상이 아름다운 얘기로 소통되는 행복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올해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도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사람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고 근본이 되는 세상.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세상. 그것이 우리가 꿈꾸는 대한민국의 품이다.
오석륜 시인/인덕대학교 일본어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