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피는 숲에 저녁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 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싶었다. 뭍으로 건너온 새들이 저무는 섬으로 돌아갈 때, 물 위에 깔린 노을은 수평선 쪽으로 몰려가서 소멸했다. 저녁이면 먼 섬들이 박모(薄暮) 속으로 불려가고, 아침에 떠오르는 해가 먼 섬부터 다시 세상에 돌려보내는 것이어서, 바다에서는 늘 먼 섬이 먼저 소멸하고 먼 섬이 먼저 떠올랐다.”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의 첫 문장이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시작할 무렵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까지의 삶을 그린 작품의 첫 구절은 이렇게 아름다운 서술로 시작된다. 바다와 그것을 둘러싼 자연, 그리고 화자의 묵직한 울림이 읽는 이에게 감동으로 전해져 온다. 가슴 속에 영원히 지지 않는 꽃으로 남을 만큼, 기억하고 싶은 문장이다. 제목을 부쳐 한 편의 시로 바꾸어도 손색이 없다.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이며 일본인에게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의 첫 문장도 역시 사람들의 가슴에 아름다운 메아리로 남아 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고 시작되어, 작품의 출발이 예사롭지 않다.
또한 가와바타 야스나리 이전에 활동한 작가로서 여전히 일본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소설가의 한 사람인 나쓰메 소세키의 『풀 베개』의 첫 문장도 작품이 출간된 지 100년이 넘었지만, 일본인과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명문장이다. “이지(理智)에 치우치면 모가 난다. 감정에 말려들면 낙오하게 된다. 고집을 부리면 외로워진다. 아무튼 인간 세상은 살기 어렵다. // 살기 어려운 것이 심해지면, 살기 쉬운 곳으로 옮기고 싶어진다. 어디로 이사를 해도 살기가 쉽지 않다고 깨달았을 때, 시가 생겨나고 그림이 태어난다.” 소설 속의 주인공이 산길을 올라가면서 풀어 놓은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농밀하다.
세계문학사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작가의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는 러시아의 작가 레프 톨스토이의 예술성 높은 작품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도 의미심장하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역시 애독자들이 오랫동안 기억하는 문장이다. 관능적인 사랑과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의 대비가 돋보이는 걸작인 만큼, ‘우리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여성의 심리묘사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을 걷다가 세 걸음 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리-타.” 이것은 러시아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의 첫 문장인데, ‘롤리타컴플렉스’ 로 불리는 이른바 ‘소아성애’ 라는 정신의학에서 쓰이는 용어가 ‘롤리타’ 에서 유래했을 만큼 유명한 작품이다. 첫 문장만 읽어보면 순간적으로 상상력이 만개할 것 같은 여운이 진하게 전해오지만, 소설의 주제나 교훈은 첫 문장이 주는 시적 표현만큼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는 평가가 있어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이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가슴에 오랫동안 남아 있고 여전히 회자되는 첫 문장은 적지 않다. 영국의 작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의 첫 문장, “상당한 재산을 가진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보편적인 진리이다.” 와, 스위스의 작가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첫 문장, “삶에서 낭만적인 영역만큼, 운명적인 만남을 강하게 갈망하는 영역도 없을 것이다.” 등도 독자들이 사랑하는 문장들이다.
이 계절이 가기 전에, 작가들의 첫 문장을 음미해보고 자신의 삶을 반추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듯하다. 아마도 신이 있다면, 그들도 이들 문장들을 탐냈을 법하다. 그것을 쓰기 위해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작가들의 노력을 헤아려 보고 책 속으로 빠져 들어가 보자. 복잡한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다면, 지금 자신의 주변에 꽂혀 있는 시집이든 소설이든 작품의 첫 문장 속으로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 첫사랑 같은 설렘이 붉은 단풍처럼 우리들의 가슴을 물들일지도 모를 일이다.
오석륜 시인/인덕대학교 일본어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