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원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사진/경총
[뉴스토마토 이재영기자] 경제계가 반격에 착수했다. 최순실 국정농단에 연루되며 한껏 움츠러든 모습에서 벗어나 전선 구축에 나섰다. 야당 주도의 국회가 각종 규제법안을 쏟아내고, 조기대선 정국과 맞물려 경제민주화가 재점화되는 것에 대한 사전차단의 의미다. 선봉에는 좌초된 전국경제인연합회를 대신해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섰다. 경제 위기의 진단과 해법을 다룬 기업인 모임에서 '규제개혁'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며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박병원 경총 회장은 9일 ‘제40회 전국 최고경영자 연찬회’ 개회사에서 “우리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은 총체적인 공급과잉과 과당경쟁으로, 기존에 하고 있는 또 할 수 있는 사업에서는 투자와 일자리 창출이 불가능하다”고 역설했다. 이어 “우리는 이미 4차 산업혁명에서도 중국에 뒤지고 있다”며 “빅데이터, 핀테크, 드론, 자율주행, 원격진료 등 어느 것 하나 규제의 덫에서 자유로운 것이 없는, 되는 게 없는 나라이다 보니 안 되는 것이 없는 나라에 뒤질 수밖에 없다”고 규탄했다.
재계에 따르면 대내적으로는 탄핵 및 대선 정국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는 가운데, 내수부진과 제조업 위기가 장기화할 조짐을 보인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TPP 탈퇴와 영국의 브렉시트 등으로 인한 무역환경의 악화, 사드 배치에 따른 대중 관계 악화 등 불안 요인들이 우리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청년실업 문제 역시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지난해 실업자가 사상 처음으로 백만 명을 넘어선 가운데, 청년실업률은 9.8%로 역대 최고치를 찍었다. 취업준비생 등을 포함한 실질적인 실업률은 22%다. 저출산 문제도 심각하다. 출산율은 1.24명으로 세계 최하위권이다. 생산가능인구는 올해부터 감소 국면으로 진입한다.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도 점점 더 고착화되고 있다. 300인 이상 대기업 정규직 근로자의 임금이 300인 미만 기업 비정규직 근로자 임금의 세 배에 달하고, 대기업 정규직 대졸 초임이 일본을 앞지른 것도 오래됐다.
이 같은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광, 의료, 농업 등에 주력해야 한다고 설명하면서 정치권 비판만큼은 놓치지 않았다. 박 회장은 “외국인 전용병원마저도 기부에 의해서만 지어야 한다는 발상을 이해할 수 있느냐”고 꼬집었다. 또 “제대로 농업을 해서 중국, 일본 등 해외시장을 개척해 보겠다는 기특한 기업들이 있어도 농민들의 이익을 침해할지도 모른다고, 해 보지도 못하게 하는 나라”라고 쏘아붙였다.
박 회장은 특히 “막대한 돈을 들여서 창업을 장려하고 공공부문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것을 대안이라고 내놓는 것 같은데 제대로 돈을 버는 일자리를 못 만들겠으니 돈을 쓰는 일자리나 만들겠다고 하는 것으로 들린다”며 “세금 내는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는데 돈을 쓰는 일자리가 얼마나 오래 지탱할 수 있겠냐”고 대선주자들의 일자리 정책에 칼을 겨눴다.
박 회장은 기업들에게도 근로시간 축소와 일·가정 양립 실천을 당부하면서 “노조, 근로자 대표들에게 매년 조금씩이라도 근로시간을 줄이고 그만큼의 재원을 청년 고용으로 돌리는 것은 이제 우리 사회의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됐다는 것을 설득하고 합의가 되는 만큼이라도 실천해 보자”고 주문했다. 이어 “임금이란 일을 한 만큼 주어야지, 회사에 오래 있었다고 더 받는 것은 근로자들에게도 공정한 일이 아니라는 인식이 뿌리내리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노동유연성에 초점을 둔 박근혜정부의 노동개혁을 뒷받침했다.
박병원 한국경영자총협회장이 9일 오전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제40회 전국최고경영자 연찬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길을 두고 왜 길 아닌 데로 가나’라는 주제로 기조강연을 맡은 김인호 무역협회 회장도 “기업의 경영을 악화시키는 각종 정책들을 남발하고 있다”며 “20대 국회 들어 경제민주화 등 발의한 법안의 약 69%가 기업 침해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공짜가 있는 분야는 경제가 아니다”며 “정치인들이 기회비용이라는 개념만 가지고 있다면 지금 같은 엉터리 법을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공격했다.
그는 또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정부와 시장과의 관계가 재정립돼야 한다며 '기업가형 국가'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은 “정부의 모든 정책과 제도가 생산적, 창의적 기업활동을 뒷받침해야 한다”면서 “경제와 기업문제의 핵심에 기업가가 있어야 된다는 게 기업가형 국가이며, 그것이 위기 해결의 ‘크리티컬 패스’”라고 힘줘 말했다.
한편, 경제계는 최근 국회에서 논의 중인 상법개정안 봉쇄에도 나섰다. 대한상공회의소는 8일과 9일 국회를 찾아 상법개정안의 5대 문제점을 지적한 경제계 의견을 여야 각 정당에 전달했다. 보고서는 최대 쟁점인 감사위원 분리선임을 비롯해 ▲집중투표제 의무화 ▲근로자대표 등 추천자 사외이사 의무선임 ▲다중대표소송 도입 ▲전자투표제 의무화 ▲자사주 처분규제 부활 등 6개 항목은 시장경제의 기본원칙을 훼손하는 등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이재영 기자 leealiv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