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기철기자] 법원행정처의 법원 내 '사법개혁 관련 설문조사 결과 발표 축소지시 의혹'과 관련해 다소 격앙됐던 일선 법원 분위기가 일단 진정상태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의혹에 휘말린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이 ‘사법연구업무’ 지시를 받고 행정처 업무에서 배제됐고, 의혹의 또 다른 당사자인 수원지법 안양지원 A판사가 진상조사위원회가 조사를 맡게 된 만큼 조사에 적극 임하겠다는 입장을 보이면서다. A판사는 지난달 16일 사표를 제출하고 휴가에 들어갔다고 알려진 것과는 달리 당일 하루 연가를 낸 뒤에는 정상적으로 출근해 업무를 보고 있는 것으로 14일 확인됐다.
이번 사태는 법관 학술회인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오는 25일 발표하려던 전국 법관 상대 설문조사 결과를 임 차장이 연구회 소속 A판사를 통해 축소하려 했고, A판사가 반발하자 인사명령을 번복했다는 게 얼개다. A판사는 사태가 있기 전 단행된 지난달 9일 법관정기인사에서 법원행정처 심의관으로 겸임 발령이 난 상태였지만 돌연 겸임명령이 철회됐다.
▲법원행정처가 A판사에게 연구결과발표 축소를 지시했는지 ▲축소지시를 받은 A판사가 이에 반발했는지 ▲A판사의 반발을 이유로 법원행정처가 겸임명령을 철회했는지 ▲A판사가 인사명령 번복때문에 사표를 냈는지 ▲법원행정처가 이를 무마하려 했는지 등이 진상조사위에서 가려져야 할 사실관계다.
고영한 법원행정처장(대법관)는 법관들의 진상규명 요구가 확산되자 지난 7일 법원 내부전산망인 코트넷에 해명글을 올려 "해당 판사에게 연구회 활동과 관련해 어떠한 지시를 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고 처장은 A판사가 법원행정처 심의관 임무를 맡지 않게 된 것도 본인 의사를 존중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법원본부 회원들이 지난 8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양승태 대법원장 퇴진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그러나 국제인권법연구회 간사를 맡고 있는 부장판사가 코트넷에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글을 올리고, 전국공무원노조 법원본부 소속 공무원들까지 지난 8일 기자회견을 열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논란은 계속됐다. 전국법원장들도 지난 9일 열린 회의에서 이번 사태에 대한 진상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양승태 대법원장에게 전달했다.
이에 양 대법원장은 지난 13일 사법연수원 석좌교수로 근무 중인 이인복 전 대법관을 진상조사위원장으로 지명하고 전권을 위임했다. 이 전 대법관은 즉시 전국 법관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오는 17일까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진상조사에 참여할 적임자를 추천해 달라"고 당부했다. 또 "조사 대상이나 방법 등 구체적인 절차는 앞으로 구성되는 진상조사단에서 논의해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이 전 대법관은 대법원으로부터 독립돼 조사위원들을 일선 법관들로부터 추천받고 있다.
최근까지 일선 법원 분위기는 법관들의 비판이 쏟아지면서 가열됐다. 지난 13일 서울동부지법과 서울서부지법, 인천지법 판사들은 판사회의를 열고 이번 사태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했다. 그 결과 서울동부지법 법관들은 "진상조사기구 조사결과 법관의 독립 또는 기본권 침해사실이나 사법행정권 남용사실이 확인될 경우 관련자를 엄중 문책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합당한 조치가 있어야 한다"는 공식 입장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의혹에 대한 조사가 진상조사위로 넘어가면서 일단 조사결과를 지켜보자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서울가정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어떤 것이 진실인지는 봐야겠지만. 서로 대화 할 때 뉘앙스나 입장의 차이가 있을 수 있어서 ‘O, X’ 로 나오지는 않더라도 어떤 취지의 얘기를 했다는 사실은 확인될 것”이라며 “조사결과를 지켜보자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부산지법의 한 판사도 “당사자간 진술과 주장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객관적 사실이 나오기 전 까지는 섣불리 단정할 수 없지 않겠느냐”며 “진상조사 결과에 따라 일선 법관들의 대응 수위도 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번 사태는 일선 법관들의 권리와 권한을 침해했다는 의혹과 판사회의 정식 안건으로 올랐다는 점에서 2008년 발생한 ‘촛불재판 개입사태’와 비교된다. 2008년 11월 당시 서울중앙지법원장이었던 신영철 전 대법관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 관련 재판을 맡은 형사단독 판사들에게 재판 독촉의 의미로 읽힐 수 있는 이메일을 여러 차례 보내 재판에 개입했고,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드러나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줬다.
전국 평판사들은 법원별로 긴급 판사회의를 열고 격렬하게 항의했다. 사태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사법파동’에 준하는 상황까지 치닫자 이용훈 당시 대법원장은 2009년 3월6일 김용담 법원행정처장을 진상조사단장으로 임명해 현직 대법관인 신 전 대법관을 조사했다. 김 처장은 윤리감사관 등 법원행정처 법관과 일선 법원으로부터 추천받은 법관 5~10명으로 진상조사단을 꾸려 신 전 대법관의 PC디스크를 분석해 이메일 원문을 확보하고, 이메일을 받은 판사 20여명을 조사했다.
진상조사단은 열흘 뒤인 3월16일 “신 전 대법관이 재판진행에 관여한 것으로 볼 소지가 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고, 신 전 대법관은 대법원 공직자윤리위 심의를 거쳐 이 전 대법원장으로부터 엄중경고를 받았다. 대법관이 윤리위에 부의되거나 대법원장으로부터 엄중경고를 받은 것은 신 전 대법관이 현재까지 유일하다.
최근 열리고 있는 판사회의는 이번 사태를 겨냥해 개최된 것이 아니라 정기 인사 후 사무분담 추인을 위해 매년 3월 예정된 판사회의로, 그 기회에 이번 사태가 논의된 것이어서 '촛불재판 개입사태'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법관들이 근무하고 있는 서울중앙지법도 오는 20일 오후 4시 판사회의가 예정돼 있지만 이때는 진상조사가 진행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별도의 입장 발표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이번 사태와 ‘촛불재판 사태’를 비교하면서 “당시는 신영철 서울중앙지법원장이 이메일을 보내는 등 객관적 사실이 드러나는 등 객관적 사실이 있어 문제가 됐지만 이번에는 어떤 것도 확실히 드러난 것이 없다”며 “진상조사 결과를 지켜보자는 법관들이 많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최기철 기자 lawch@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