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숙의 파리와 서울 사이)여론조사 공표금지는 구시대의 유물

입력 : 2017-05-16 오전 6:00:00
비밀이 누설되는 첫 번째 경로는 다음과 같다. A가 B에게 “너만 알고 있어야 한다”며 어떤 정보를 준다. B는 그러마고 약속하지만 곧 C에게 “너만 알아야 한다”며 또 다시 누설한다. 이 같은 과정이 반복되며 비밀은 만천하에 공개된다.
 
이번 대선에서 실시된 여론조사 또한 이와 같았다. 한국 공직선거법 제108조 1항은 선거일 전 6일부터 선거일 투표마감 시각까지 여론조사 공표를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일주일 간 여론조사 실시가 금지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따라서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는 얼마든지 밖으로 새 나갈 수 있다. 이 같은 우려를 기우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현실은 과연 어떠했을까.
 
선거 3일 전의 일이다. 필자가 들어가 있는 한 모바일 채팅방에 누군가가 모 회사의 여론조사 결과라는 자료를 올리고는 “엠바고다. 다른 데로 새지 않도록 해 달라”고 비밀유지를 당부했다. 선거 당일에도 어김없이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방송 3사가 실시한 출구조사결과를 올리며 비밀엄수를 부탁했다.
 
선거캠프나 여론조사기관, 혹은 언론사에 친구를 두고 있는 한 인물이 공표 금지된 여론조사 데이터를 받아 올린 것이다. 공표금지 기간이지만 특정인들은 여론조사 결과를 알 수 있었다. 현실이 이러한데 선거여론조사 공표금지는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위해 유지되어야 하는 것인가.
 
여론조사 결과는 유권자가 투표를 결정하는데 하나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런 자료를 한국은 일주일이나 공표를 금지시키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방금 전 증거를 제시했듯 특정인들은 이 기간 중 여론조사 결과를 알 수 있는데 일부 유권자들만 알 수 없도록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불공평한 사회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프랑스는 7일 실시된 대선 결선투표 여론조사 결과를 이틀 전부터 공표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2002년까지만 해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공표 금지기간은 1주일이었다. 프랑스 학계와 언론사, 여론조사 업계는 이 1주일간의 공표금지 해제를 위해 치열하게 대항했고, 그 결과 전면해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금지 기간을 이틀로 단축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개정이 이루어진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먼저 여론조사 공표금지는 국민의 알권리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여론조사 공표금지법은 정보의 전달과 수신의 자유에 제약을 주며, 유럽 협정(1995년 2월17일 제정) 제 10조의 인권과 기본적 자유 항목인 ‘표현의 자유 보호’에 위배되고 있다. 게다가 1995년 프랑스 대선 때, 스위스의 신문 라 트리뷘 드 주네브가 인터넷 웹사이트에 프랑스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또한 미국의 CNN은 프랑스 대선 여론조사 결과를 조회할 수 있는 프랑스 주요 언론의 해외 웹사이트 주소를 알려주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2001년 9월4일부터 프랑스의 최고행정재판소는 여론조사 공표금지를 재고하기 시작했고 2002년 4월 급기야 법 개정을 단행했다.
 
이처럼 프랑스 정부는 인터넷의 등장으로 정보 환경이 180도 바뀌고, 일부 지역에서 정보소통을 차단한다 한들 다른 지역으로 흘러나가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자 법을 개정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이러한 변화에 아랑곳 하지 않고 구시대의 사고에 갇혀 여론조사 공표금지를 고집하고 있다. 시대의 흐름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공표금지가 아니라 과학적인 여론조사가 생산되도록 엄격한 감시와 규제를 하는 것이다. 지난 19대 대선에서 여론조사의 진위 여부를 놓고 각 선거 캠프는 난타전을 벌였다. 이들은 심지어 몇몇 여론조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선관위에 조사해 달라고 의뢰까지 했다. 그 중 일부는 엄밀히 말하면 여론조사가 아닌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지난 달 한 여론조사기관이 실시한 조사는 표본이 대표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응답률을 보면 20~30대가 56%, 60대가 4%다. 그러나 실제 투표에서 누가 더 투표에 참여하는가. 20~30대보다 60대의 투표율이 더 높은 것은 삼척동자도 알지 않던가.
 
이처럼 여론조사의 기본요건도 충족시키지 못한 조사가 여론조사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공표되고 있으니 이처럼 심각한 일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여론조사의 생명력은 대표성이다. 따라서 이 기관의 조사는 여론조사의 생명력을 잃어도 한참 잃었다. 이런 조사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에 등록 자체를 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한국 정부는 과학적인 여론조사를 양산하는 풍토를 시급히 조성하고, 공표금지를 푸는 것이 마땅하다. 정보가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넘나드는 지금, 여론조사 공표금지법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악법은 민주정부가 들어선 지금 가차 없이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것이 정답이다.
 
최인숙 파리정치대학 정치학 박사
 
* 편집자 주 : 필자 최인숙은 파리에서 10년간 체류했고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 Paris)에서 한국, 일본, 프랑스 여론 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근 프랑스 정치현상을 잣대로 한국의 정치현실 개선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책 ‘빠리정치 서울정치(매경출판)’를 펴냈다.
‘파리와 서울 사이’는 한국과 프랑스의 정치·사회현상을 비교 분석하는 연재 코너로 <뉴스토마토> 지면에는 매주 화요일자 23면에 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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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