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홍연기자]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과 실행을 지시한 혐의로 기소돼 선고를 앞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법정에서 모든 혐의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재판장 황병헌) 심리로 28일 진행된 피고인 신문에서 김 전 실장은 ‘블랙리스트’ 작성과 집행 사실에 대해 대부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잘 모른다”는 답변을 했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첫 질문으로 ‘근무 때부터 청와대에서 ‘블랙리스트 명단을 만들어서 관리한 것이 사실인가’를 묻자 “사실 자체를 재임 중에 알지 못했다. 비서실장 재임 당시 명단 작성에 대해 누구도 보고한 적이 없어서 모르고 퇴임했다"고 말했다.
김 전 실장은 블랙리스트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노태강 당시 문체부 체육국장(현 2차관) 등 문체부 1급 공무원들에게 사표를 받으라고 지시한 혐의에 대해서도 부인했다. 그는 “실·국장 인사는 인사위원회 심의 대상이 아니다”며 “사직서를 낸 분들과 면식이 없고, 그들이 일을 잘하지 못한다고 불만을 가진 일도 없다. 사직을 강요하거나 종용할 동기가 없다”고 반박했다. 특검이 '블랙리스트'를 적용하는 과정에 관여한 공무원들의 심리적 괴로움이 담긴 증인 신문 조서를 공개하며 “청와대가 문체부 직원들을 왜 이렇게 괴롭혔냐”고 묻자, 김 전 실장은 “전 괴롭힌 일이 없다. 참모들이 괴롭힌 것도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특검이 당시 국정원이 청와대에 올린 ‘시도 문화재단의 좌편향 일탈 행태 시정 필요’라는 제목의 문건을 제시하며 “이런 유사한 내용의 문건들이 많이 있었냐”는 질문을 하자 “제가 나이 드는 게 자랑은 아니지만 3~4일 전 있었던 일도 잘 기억이 안 난다. 80살 먹은 노인이 3~4년 전에 있었던 그 많은 문서를 잘 기억할 수 없다”고 답했다. 이어 “국정원 등 수사기관에서 이념 관련 보고를 청와대에 보고했던 것으로 기억은 한다”고 덧붙였다.
김 전 실장은 '민간단체 보조금 TF'가 청와대 주도로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재임 중에는 몰랐다’며 실무진과 문체부 직원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그는 “누가 (좌편향 인사 지원배제를) 전면에 내세운 건가”라는 특검 질문에 “저 문건을 작성하고 자료를 모은 실무진들이 알 거다”고 말했다. 특검이 “실무진들이 자기 마음대로 저런 걸 썼다는 건가”라고 재차 묻자 “청와대 실무진인 행정관이나 비서관들이 부처에 나가면 실·국장으로 재량을 갖고 일한다”고 답했다.
한편 이날 법정에서 방청하던 임인자 전 변방연극제 예술감독은 김 전 실장을 향해 "뭘 몰라! 거짓말 하지 마세요"라고 소리를 질러 퇴정 조치 되기도 했다. 재판부는 이날 피고인 신문을 마치고 다음달 3일쯤 결심공판을 열어 심리를 마무리할 예정이다. 보통 결심공판 2~3주 뒤에 선고가 이뤄지는 점을 감안할 때 김 전 실장 등에 대한 1심 판단은 다음 달 중 나올 것으로 보인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28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관련한 33차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서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홍연 기자 hongyeon1224@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