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재영 기자] 한미 FTA가 끝내 수술대에 올랐다. 트럼프 미 대통령이 후보 시절 ‘끔찍한 재앙’이라며 벼렸던 문제다. 트럼프정부의 과격한 보호주의에 FTA가 변질될 것에 대한 산업계의 주름도 깊어졌다. 통상 압박은 이미 현실이 됐다. 특히 북핵 문제로 대북 공조가 절실한 상황이어서 우리정부의 협상력도 약화될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한미 양국은 지난 4일(현지시간) 한미 FTA 개정 협상에 착수하기로 합의했다. FTA 폐기 카드를 꺼내드는 등 트럼프정부의 압박공세가 개정 합의를 이끌어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을 ‘미치광이’로까지 포장하면서 한국 측을 압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국은 각각 국내법에 따라 개정 협상 절차에 착수할 예정이다.
한미 FTA 개정이 현실화되자 최근 북핵 문제와 맞물려 한국정부가 협상 테이블에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대북 공조가 약화될 것에 대한 부담 때문에 한국정부의 대미 협상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조정훈 여시재 부원장(전 세계은행 우즈베키스탄 지역대표)은 9일 “안보적 결정이 경제적 결정으로 뒤집히진 않을 것”이라면서도 “미국에서 재채기하면 이쪽은 태풍인 게 안타깝지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중재 경험을 예로 들면서 "‘바게닝 파워(bargaining power·교섭력)’가 없는 협상은 명령과 복종일 수밖에 없었다”며 “한미 간에 얽혀있는 경제적 현안들에 대해 극히 눈치를 보는 상태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번 협상과 관련해 미국 무역 적자의 주범으로 지목됐던 자동차와 철강 업종이 특히 전전긍긍하고 있다. 관세 부활 또는 반덤핑관세의 표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는 FTA에 따라 지난해 완전 폐지된 관세(2.5%)가 부활할 수 있다. 대미 수출 규모를 고려해 FTA 개정에 따른 손실이 가장 클 것으로 꼽힌다.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에 따라 FTA와 무관하게 관세 없이 수출하는 철강 업종에도 개정 협상의 파장이 미칠 수 있다. 이미 올 들어 한국산 철강제품에 대한 반덤핑·상계관세 부과 조치가 잇따랐다. FTA 개정 협상을 계기로 이런 제재가 더욱 엄격해질 수 있다는 관측이다. 대미 무역수지 흑자 규모가 크면서 FTA 양허품목인 가전제품이나 기계 업종 등도 타깃이 될 수 있다. 석유화학제품처럼 대미 수출량이 미미한 품목도 중국 등 신흥시장의 자급력이 커지는 상황에서 다른 수출길이 막히는 부담이 생긴다.
트럼프정부는 FTA를 비롯해 전방위적으로 통상압박 수위를 높이는 양상이다. 재계는 지난달 한국산 태양광 패널에 이어 이달 5일 한국산 세탁기에 대한 국제무역위원회(ITC)의 산업피해 판정으로 미국발 악재가 겹쳤다. ITC가 올해 말 트럼프 대통령에게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를 건의하면 내년 초 발동 여부가 정해진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세탁기 세이프가드 조치와 관련해 오는 11일 삼성전자, LG전자 등 관련 기업 관계자들과 대책회의를 열기로 했다. 미국 우선주의를 부르짖는 트럼프정부의 기조가 강경한 만큼 재계에선 후폭풍을 피하기 어렵다는 회의론이 짙은 분위기다.
이재영 기자 leealiv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