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아 산업1부 기자
근래 세상의 시끄러움 속엔 '트럼프'가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통상 압박이 전방위로 확산되면서 여기저기서 온통 트럼프 이야기로 가득하다. 비단 한국뿐만이 아니다. G2의 한 축인 중국, 트럼프 못지않은 도발적 기질의 북한 등 전 세계가 트럼프의 표적이다.
그가 미 대통령에 당선될 때부터 비극은 예견됐다. '미국 우선주의'를 외치며 백악관에 입성한 그가 한국에 통상 압력을 높이고, 북한의 김정은에 대해서도 단호한 대응으로 일관할 것이란 점은 예고된 수순이었다. 단지 걱정했던 수많은 현안들이 불과 1년도 안 돼 현실화되고 있는 '속도' 앞에 놀라울 뿐이다.
국내에서는 추석 연휴 동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개정과 국내산 세탁기에 대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 조치) 발동 검토 등 한국 경제에 부담이 되는 요소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미 국제무역위원회는 지난 5일(현지시간) 삼성과 LG가 수출한 세탁기로 자국 산업이 심각한 피해를 보고 있다고 판정했다. 삼성·LG의 경쟁 상대인 월풀이 제기한 세이프가드 청원에 ITC 위원 4명이 만장일치로 월풀 손을 들어줬다. 지난달 22일 한국산 태양광 패널에 이어 두 번째 자국 산업 피해 판정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 같은 판정이 하루 전인 4일 한미 양국 정부가 FTA 재개정 협상을 하기로 합의한 직후 나왔다는 데 있다. FTA 재개정 협상 개시를 기다렸다는 듯 한국에 공포심을 느낄 만한 카드를 내밀었다.
익히 알려졌듯 트럼프는 '공포'를 협상 전략으로 이용한다. 상대방의 공포심을 극대화시킨 뒤 자신이 취할 최대한의 이익을 얻어내는 방식이다. 전형적인 장사꾼이다. 트럼프는 한미 FTA 재협상과 관련해 측근들에게 '미치광이(madman) 전략' 사용을 주문했다. 그는 지난달 초 로버트하이저 무역대표부(USTR) 대표에게 30일의 시간을 주겠다며 그 안에 한국으로부터 양보를 얻어낼 것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면서 한국에는 "'대통령이 제 정신이 아니라서(This guy's so crazy) 지금 당장이라도 한미 FTA를 폐기할 수 있다고 말해라"고 했다고 한다.
트럼프의 미치광이 전략에 우리정부는 허둥지둥 끌려가는 모습이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폐기 서한까지 작성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블러핑(엄포)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하면서 트럼프의 전략은 과녁을 향해 한걸음 더 나아갔다. 대북 공조를 의식해야 하는 한국으로서는 미국의 통상 압박에 약자일 수밖에 없다. 애초에 기울어진 협상 테이블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정부가 트럼프 전략의 본질을 알고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수밖에 없다. 치밀한 전략으로 상대에게 우리 논리를 관철시켜야 한다. 영리함 속에 영민함까지 필요한 순간이다.
그 첫 걸음으로 정부와 전자업계 관계자들은 11일 '미국 세탁기 세이프가드 관련 민관 합동 대책회의'를 가졌다. 회의에서 민관은 '국내 기업들의 세탁기 미국 수출이 제한되면 미국 소비자의 선택권이 침해되고, 제품 가격이 올라가는 부작용이 발생할 것'이라는 논리로 적극 대응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미국 여론을 의식한 논리가 돋보였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다. 미국 내 우군의 필요성도 커졌다. 막대한 무기 수입까지 험로가 펼쳐져 있다. 마땅히 취할 대안이 없는 게 아니라, 그 부재 속에서도 국익은 지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