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재영 기자] ‘거수기’로 전락한 주주총회에 대한 대대적 수술이 단행된다. ‘섀도보팅’ 폐지로 새해부터는 주총 의결정족수를 채우기 위해 전자투표제 등 소액주주의 참여를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됐다. 궁지에 몰린 재계는 제도 일몰연장 등을 정부에 건의하고 있으나, 그에 따른 반대급부로 경제민주화 입법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다.
섀도보팅은 의결정족수 부족으로 주총이 무산되지 않도록 회사가 요청할 경우 예탁결제원이 주총에 참석하지 않은 주주들을 대신해 투표하는 제도다. 상법상 주총을 열기 위해서는 발행주식 총수의 4분의 1 이상(감사 선임시 3분의 1 이상)이 필요하다. 예탁결제원은 주총 참석주주의 찬반 비율에 따라 예탁된 주식의 의결권을 행사한다. 주총 결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정족수 충족에만 도움을 준다. 1991년 도입된 섀도보팅은 2015년 1월1일 폐지될 예정이었으나, 상장사들의 반대로 3년간 유예됐다. 그 일몰기한이 다가오면서 상장사들은 다시 비상에 걸렸다. 정부는 소액주주 권리 보호와 기업들의 자발적 주총 활성화 유도를 위해 섀도보팅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재계는 뚜렷한 대책이 없어 내년 정기 주총부터 안건 처리에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우려한다.
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지난 3월 정기주총을 개최한 12월 결산 상장사 2058곳 중 642곳(31.2%)이 섀도보팅을 요청했다. 법무부가 서울대 산학협력단에 용역한 ‘섀도보팅 실태 분석 및 폐지에 따른 대응방안 연구’ 결과, 2014년 1월부터 올 3월까지 3년간 섀도보팅을 통해 의결된 주총 안건은 6268개였다. 이중 73.2%(보통결의 기준)는 섀도보팅이 없었다면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했을 것으로 분석됐다. 재계는 특히 감사 및 감사위원 선임의 경우 ‘3%룰’에 따라 섀도보팅 폐지 시 정족수를 채우는 데 어려움이 클 것이라고 호소하고 있다. 3%룰은 의결권 있는 발행주식 총수의 3%를 초과하는 대주주는 초과분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한 규정이다.
재계는 섀도보팅을 연장하거나, 폐지에 따른 대안으로 3%룰을 폐지 또는 의결정족수 기준 완화를 정부에 건의하고 있다. 정부는 그러나 전자투표제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전자투표제는 주주가 주총에 직접 참석하지 않아도 PC나 모바일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2010년 5월부터 시행됐지만 채택 여부는 기업들이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이를 시행하는 기업들이 드물고, 실제 실행 사례는 상장시장 전체 주주의 평균 1% 안팎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된다. 재계는 상장사 주주들의 주식보유기간이 코스피는 약 7.3개월, 코스닥은 약 3.1개월로 조사돼 주주들이 주총에 관심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전자투표의 실효성이 낮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국회에는 섀도보팅 폐지 시점을 추가 유예하거나 의결정족수 기준을 완화하자는 법안도 발의돼 있다. 폐지 시점을 전자증권이 도입되는 2019년 9월까지 유예하자는 자본시장법 개정안과 의결정족수를 발행주식 총수의 5분의 1 이상으로 낮추는 상법 개정안이 각각 정무위원회와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자유한국당이 이들 법안을 밀어붙이며 정부여당과 대치하는 형국이다. 일각에선 정부여당이 야당으로부터 경제민주화 상법 개정안에 대한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 섀도보팅 관련 법안을 저울질하고 있다는 관측도 제기한다.
일례로 국회에는 감사위원분리선출 내용의 상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기존 감사위원은 주총에서 일단 모든 이사들을 선임한 다음 그 중에서 감사위원이 될 이사를 뽑는 일괄선출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에 따라 3% 룰은 감사위원 선임 시에만 적용됐는데, 개정안은 이사 선임 단계부터 감사위원이 될 이사를 구분 선출해 3%룰도 적용토록 했다. 또 다른 상법 개정안인 집중투표제까지 연결되면 이사회 독립성이 대폭 확대될 수 있다. 집중투표제는 이사 선임 시 1주당 1표의 의결권만 행사할 수 있는 기존 방식에서, 선출하는 이사 수만큼 의결권을 부여해 선호하는 이사에게 표를 몰아줄 수 있다. 3%룰이 적용되는 감사의 경우 소수주주가 추천한 후보가 감사가 될 확률이 높아진다. 재계에서는 외국인 투자자의 집단행동으로 경영권 방어가 어려워질 수 있다며 반대하고 있다.
내년부터 시행되는 스튜어드십코드도 재계로서는 부담이다. 스튜어드십코드는 연기금과 자산운용사 등 기관투자자가 기업의 의사결정에 적극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의결권 행사 지침이다. 지난 1일 운용자산 규모가 600조원에 달하는 국민연금공단이 스튜어드십코드 도입을 공식화했다. 국민연금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찬성 건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 맞물려 논란이 컸던 만큼 국민연금의 적극적 의결권 행사가 점쳐진다. 국민연금은 3분기말 기준 삼성전자 9.71%, SK하이닉스 10.37%, 현대차 8.12% 등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국내 기업이 278개나 된다. 재계로서는 과거 우군으로 여겼던 국민연금을 방어해야 하는 또 다른 상황으로 내몰렸다.
이재영 기자 leealiv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