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신태현 기자] "우리가 나서봤자 바뀌지 않아."
영화 '1987'의 극중 인물 연희(김태리 분)의 푸념이다. 연희만 그렇게 생각했을까. 아니다. 대의민주주의만이 민주주의의 전형이라는 생각이 고착된 대한민국에서 직접민주주의는 불온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30년 뒤 ‘촛불혁명’으로 새 정부가 들어섰다. 서울을 비롯한 지자체에서는 시민들이 직접 정책을 입안하고 예산에 관여한다. 직접민주주의의 시대인 것이다. 이제는 직접민주주의 실현을 관 주도에서 시민 주도로 바꿔야 할 때다. 2018년 새해를 맞아 직접민주주의의 현주소를 짚어봤다.(편집자주)
"카카오톡으로 불법 음란지 전단지 신고를 받아주세요", "임대료 걱정 없도록 야학 등 평생학습기관을 지하철 역사에 세워주세요."
서울시 사이트 '민주주의 서울'에 올라와 공감을 얻고 있는 주민 제안들의 내용이다.
서울시는 그동안 천만 시민의 요구를 반영하기 위해, 시민이 정책을 제안하고 정책 입안에 참여할 수 있는 사이트를 만들어왔다. 그 숫자는 200개가 넘는다.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시민과 토론회를 여는 '청책토론회'는 대전시의 '시민행복위원회'로 이어졌다. 시민 1000명의 온라인상 지지를 얻으면 담당 부서가 답변하는 '서울 천만인소'는 청와대의 국민청원으로 확대됐다.
'민주주의 서울'은 시민의 정책 제안 사이트 중에서도 참여 측면에서 정점에 이르는 시도로 평가된다. 정책 제안부터 실행까지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으로, 스페인의 마드리드시의 '디사이드 마드리드'를 벤치마킹했다. 디사이드 마드리드는 16세 이상 시민이 정책·입법을 제안해 유권자 1%의 찬성을 얻으면 국민투표로 찬반을 결정하는 시스템이다.
'민주주의 서울'도 이와 유사하게 정책이 만들어지고 실행되는 과정에 시민이 관여한다. 서울 시민이 제안한 정책은 우선 전문가로 이뤄진 '행정평가단'의 검토를 받는다. 행정평가단은 주로 조례나 상위법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판단하고, 적절한 정책인지도 나름대로 판단한다. 제안된 정책이 담당 부서의 검토 대상이 되려면, 사이트에 올라온 지 10일 동안 다른 시민이 눌러주는 '공감'을 10표 얻어야 한다. 10표 얻은 제안에 대해서는 담당 부서가 20일 동안 채택 여부를 판단해 답해준다.
부서가 채택한 제안 중 이슈가 될 만하거나 시민의 의견을 물어볼 필요가 있는 정책은 시민 투표 대상이 된다. 시민, 전문가, 공무원으로 꾸려지는 제안실현위원회(가칭)가 투표 대상을 거른다. 시민들의 제안이 워낙 다양하다보니 각 분야에 맞는 전문가를 불러오는 데 시간이 걸려, 위원회 구성은 최대 4개월 정도 걸린다. 전문가 일부는 행정평가단에서 끌어오기도 한다.
1일 서울시에 따르면 민주주의 서울에 올라온 정책제안은 작년 10월24일 개설 이래 12월28일까지 380건이다. 서울시는 지난해에 온라인 플랫폼 개설 자체에 의의를 두는 편이었다. 그러나 올해는 오프라인과 온라인 연계에 총력을 다하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서울시의 각종 부서는 시민과 함께 하는 정책 토론회를 활발히 이어왔다. 하지만 시민의 입장에서는 토론이 끝나고 나면 토론 기록을 열람하기 힘들거나, 자신의 발언이 정책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알기가 어려웠다. 이에 서울시는 토론회 내용을 '민주주의 서울'에 올리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토론회 내용을 대중에게 공개하고, 토론회에서 특정 발언을 한 시민이 필요할 경우 발언 내용을 온라인상으로 수정할 수도 있게 하려는 취지다.
'민주주의 서울'은 각 지자체에서도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경기 수원시는 지난해 11월20일부터 '수다'를 시범 운영하고 있으며, 광주광역시와 경남 창원시도 플랫폼을 개설하기 위해 서울시에 문의하고 있다.
서울시를 비롯한 지자체의 직접민주주의 실험에 대해서는 직접민주주의의 실현 가능성을 더 늘린다는 의의가 있다는 평가가 잇따른다. 한국민주주의연구소의 이영제 연구원은 "서울은 한국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서울시의 직접민주주의 정책은, 인구가 너무 많아서 직접민주주의가 힘들다는 우려를 불식시킨다"고 말했다.
또 단순히 시민이 제안만 할 뿐 아니라, 정책 입안 과정에서 시민과 전문가·공무원이 보조를 맞추거나, 토론회와 온라인을 연계하는 노력은 직접민주주의가 대중의 '변덕'으로 흐를 여지를 줄여준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직접민주주의 실험이 시민의 참여를 늘리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창원 한성대 행정학과 교수는 "지자체의 직접민주주의 정책은 이전 중앙정부의 일방적인 정책 결정보다 분명히 진일보했지만 지자체가 주도하는 측면이 있다"며 "지자체가 어떻게 직접민주주의 정책에서 손을 놓을지 지금부터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5월27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미세먼지 원탁토론회. 사진/서울시
신태현 기자 htenglish@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