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윤 칼럼니스트
반복된 지적에도 좀처럼 고쳐지지 않아 이제는 ‘시어머니 잔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언론의 고질병 몇 가지를 다시 지적하고자 한다.
먼저 주관적 용어의 남발. 이명박 전 대통령 최측근이었던 김희중 전 청와대 부속실장이 이 전 대통령에게 불리한 진술을 시작하자 상당수 언론들이 “배신”이라고 썼다. 비근한 예로 <ㅈ일보>는 1/18일자에서 <문고리들의 배신? MB의 김희중, 박근혜의 3인방> 제목으로, <ㄱ일보>는 <아내 죽음에 한 맺혀…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김희중의 배신>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김희중’으로 기사를 검색해보니 약 60%의 매체들이 기사 본문이나 제목에 배신, 복수 등의 용어를 썼다. 배신인지 아닌지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MB측근 김희중씨, 국정원 돈 진술 시작”이라고 쓰면 된다. 배신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전 대통령과 그의 측근 정도일 것이다. 배신이라고 쓴 언론들은 이 전 대통령의 대변지인가.
“구속 위기”라는 관행적 제목도 마찬가지다. 검찰이 영장을 청구하면 “아무개 구속위기”라고들 쓴다. 구속이 위기인지 아닌지 역시 입장에 따라 달라진다. 언급하기 민망할 정도의 상식이지만 참담함을 무릅쓰고 적는다. 논평이나 사설, 칼럼은 주관성을 띄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팩트를 전달하는 기사는 중립-객관적 시점을 견지해야 한다. “구속위기”라고 쓰는 것은 이미 객관성을 상실했다는 자백이다. “우병우 구속위기” “최경환의원 구속위기”…이루 열거하기조차 지겹다. 언론이 구속영장 피청구자들의 대변지인가.
둘째, 보지 않고도 본 듯 쓰는 습관적 어휘들이다. 누가 검찰에 불려나가면 “아무개 씨가 몇 시간 동안 고강도 조사를 받았다”고 쓴다. 기자가 조사실에 입회했나? 고강도인지 저강도인지, 우병우 전 민정수석처럼 수사팀 세워두고 팔짱끼고 웃으며 담소하다 나왔는지 어떻게 아는가. 이 역시 “몇 시간 조사후 귀가”라고 쓰면 된다. 이 점을 지적받으면 “무의식적 습관에서…”, “여지껏 그렇게 써와서”라고들 변명한다. 천만의 말씀! 단순한 용어선택이나 습관 문제가 아니다. ‘인식’의 문제다.
셋째, 특정사건에 피해자 이름을 붙이는 점이다. 아직도 기억에 선연한 ‘나영이사건’이나 ‘효순-미순이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관련 법이 만들어질 때 조차 “일명 아무개 법”이라고 못박아버린다. 보호받아야 할 피해자를 타이틀에 사용함으로써 사건의 본질을 뒤바꾸는 것은 물론 오래도록 후속 피해를 준다. 관행처럼 저질러지는 인권파괴이자 제2의 살인이다. 이름을 붙이는 게 좋은 방법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정히 이름을 붙여 여론을 환기하고자 한다면, 가해자 이름으로 지칭하는 게 맞다.
마지막으로 선정성 문제다. 기사로 다루느냐 마느냐, 다루면 어떻게 다루느냐라는 점은 언론의 제1기능인 ‘의제설정(아젠다 셋팅)’의 핵심사항이다. 선정적 보도는 우리 언론의 거의 전 방면에서 광범위하게 빚어지고있기에 특정 예를 드는 것 자체가 어려울 정도로 많다. 평창올림픽 남북공동참가 실무준비차 21일 서울에 온 현송월 북한 ‘삼지연관현악단’ 단장 일행을 보도한 <ㅇ뉴스> 기사를 보자. “코트단추에는 보석장식이 빛나고, 높은 굽의 앵클부츠에도 금색 메탈장식이 포인트로 들어가 자칫하면 단조로울 수 있는 패션에 세련미를 더했다. 왼손 네번째 손가락에는 깔끔한 스타일의 반지를 꼈고, 보석이 박힌 집게핀으로 머리를 묶어 스타일리쉬한 차림을 완성했다. 모피목도리의 경우 여우 털일 가능성이 크다고 패션관계자들은 입을 모았다. 현송월은 판문점 실무접촉회의때도 프랑스 명품브랜드 에르메스의 수천만 원짜리 악어가죽 가방과 비슷한 스타일의 녹색 클러치백을 들고 와 주목받은 바 있다(중략)”. 마치 몽타쥬를 만들 듯, 얼마 짜리 가방에 몇 번째 손가락에 무슨 반지를 꼈는지 세세히 묘사할 만큼 중요한 문제인가. 현깃증이 인다. 몇 년 전 ‘현송월 사망설’을 보도했던 <ㅈ일보>는 오보에 대해 일언반구 사과도 없이 천연덕스럽게 기사를 썼다. 후안무치다. <언론학개론> 강의를 하자는 것 아니다. 전술한 기사들에 달린 “이러니 기레기!”라는 댓글들을 보라. 이런 게 바로 언론적폐다. 새로운 것, 즉 ‘뉴스’를 다루는 언론이 시대변화에 가장 둔감하다. 지금 당장 고치지 않으면 외면받는 것, 시간문제다.
이강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