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사람 눈 형상의 거대한 스크린과 T자형 돌출 무대, 그 위를 종횡하는 4m 높이의 홍학과 벌, 상어 의상을 뒤집어 쓴 댄서들. 지난 6일 밤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미국의 팝스타 케이티 페리의 내한 공연은 음악을 '시각 예술'로 확장시킨 미적 체험이었다.
미국에서 공수해왔다는 100톤 규모 장비는 숫자만큼이나 압도적이었다. 곡이 바뀔 때 마다 새로운 장치가 등장했고 그에 맞게 조명과 영상, 의상이 실험적으로 변주됐다. 그 가운데에 선 페리는 마치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윌리 웡카처럼 '형형색색의 세계'들을 지휘하는 디렉터에 가까웠다.
사람 눈 형상의 거대 스크린이 설치된 케이티 페리 공연 현장 모습. 사진/PAPAS E&M
케이티 페리는 미국 출신의 세계적인 '팝의 여왕'으로 평가 받는 가수다. 지난 2008년 정규 앨범 '원 오브 더 보이즈'(One of the Boys)로 빌보드 차트에 오르며 데뷔 즉시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4집 '위트니스(Witness)'까지 팝과 신스팝, 레게, 리듬 앤 블루스 등의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들로 세계적인 뮤지션이 됐다.
특히 다채로운 음악적 색깔만큼이나 우주와 해저, 장미밭 등 상상력을 더한 콘셉트의 공연 연출로도 유명하다. 이날 공연은 월드 투어의 일환으로 성사된 데뷔 17년 만의 첫 내한 공연이었다.
입장 2시간 전부터 관객들이 줄 지어 서있는 고척돔의 모습.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미세먼지 경보에 서울 잠실의 프로야구 경기마저 중단된 이날 밤. 약 1만 5000여명 관객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페리 만의 세계관이 응축된 이 '전시회'를 찾았다. 공연 시작 두 시간 전인 오후 7시부터 고척돔 1, 2층 여기저기 길게 늘어선 줄이 장관이었다. 페리의 마스코트로 불리는 상어 인형과 분홍색 가발 등 통통 튀는 의상을 한 팬들의 얼굴에는 기대감과 설레임이 한 움큼 묻어 있었다.
공연은 예정시간이었던 오후 9시에서 5분이 넘어가던 찰나에 시작됐다. 고척돔 전체가 암전되더니 눈 형상의 스크린에 우주 속 세계가 펼쳐지던 시점이었다. 이윽고 T자형 무대의 교차 지점의 리프트 무대와 함께 한국식 빨간 족두리에 빨간 의상을 한 페리가 분출하는 마그마처럼 튀어나왔다. “와썹 서울! 메익썸 노이즈”
'룰렛'(ROULETTE), '다크 호스'(DARK HORSE), '체인드 투 더 리듬'(CHAINED TO THE RHYTHM)으로 이어지는 쉴 새 없는 그의 음악에 관객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페리는 댄서들과 함께 형형색색의 거대한 주사위 큐브 위에 올라가거나 서커스에서 볼 법한 4m 높이의 모형물과 어울리며 노래했다. 5인조의 밴드와 2명의 코러스도 그들이 펼쳐 내고 있는 '예술 세계'에 자연스레 합류했다.
오프닝 빨간 의상을 하고 나타난 케이티 페리 모습. 사진/PAPAS E&M
대표곡 중 하나인 '핫 앤 콜드'(HOT N COLD)를 연주할 때부터는 관객들과 직접 교감하기 시작했다. '핫'과 '콜드'의 한국어 발음을 관객들에게 묻기도 하고 관객들의 발음을 그대로 따라 하면서 장내에 웃음바다가 퍼졌다. '라스트 프라이데이 나잇'(TGIF)을 부르고 나서는 "진짜 오늘이 금요일이네요"라며 소스라치게 놀라자 관객들 모두 유쾌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혹시 오늘 저에게 한국어를 제대로 가르쳐 주실 분?" 공연의 최대 '사건'은 대표곡 '캘리포니아 걸스'(CALIFORNIA GURLS)를 부른 이후였다. 관객들을 살펴보던 그는 자신의 마스코트인 상어 인형 복장을 한 관객을 향해 손을 들어 무대로 와줄 수 있냐고 물었다.
'한준'이라 스스로를 소개한 상어복장의 관객은 페리에 '셀피', '아이 러브 유'를 한국말로 가르쳐 줬고 함께 엄지와 검지로 하트(한국식 하트)를 만들며 사진도 찍었다. 유쾌하고 발랄하게 한국 관객들과 소통하는 모습에 관객들은 연신 웃음과 박수로 화답했다.
"난 호랑이의 눈을 하고 있어, 파이터라서/ 불길 속에서 춤을 추면서/왜냐하면 난 챔피온이니까/ 넌 내가 포효하는 소리를 들을거야! 더 크게, 사자보다도 더 크게" "오오오오/오오오오"
핸드폰 불빛을 밝히며 페리의 공연에 화답하는 관객들.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공연 말미 그의 최고 히트곡 '로어'(Roar)가 울려 퍼지자 삽시간에 관중들은 고척돔이 날아갈 듯 '포효'하기 시작했다. 눈 형상의 스크린에는 기하학적 문양들이 수놓아지고, 관객들은 형형색색의 야광봉을 흔들었다. 페리는 연신 "컴온", "렛츠고"를 외치며 댄서들과 무대 곳곳을 누비며 관객들과 떼창을 했다. 곡 말미엔 앨범에선 들어볼 수 없던 페리의 힘찬 ‘포효’가 돔 전체에 울려 퍼졌다.
각기 다른 행성을 상징하는 듯한 원형 물체, 장미에 달린 봉을 타고 360도 회전하는 댄서, 테트리스를 연상케 하는 2D 게임 영상. 처음부터 끝까지 뒤바뀌는 화면과 구성, 안무로 버무려진 페리식 공연 흐름은 그가 왜 ‘팝의 여왕’인지를 그대로 설명하고 있었다.
"어제는 한국식 바비큐를 먹어봤어요. 너무 행복했습니다." 한국 관객들에 대한 애정 어린 진심은 그의 공연을 더 빛나게 해주는 매개였다. 브이 표시를 하다가 '한국식 하트'를 하는 그를 보며 모든 관객들이 같은 제스처로 하트를 선물했다.
앙코르곡은 떼창과 함성, 폭죽의 뒤범벅된 '파이어워크'(FIREWORK). 한국말로 "감사합니다"를 두 번이나 연거푸 세게 토해낸 그는 관객들에게 마지막까지 거대한 100톤 규모의 '시각 예술'을 체험케 했다. 자신의 세계로 들어온 관객들을 반기며 그렇게 교감했다. 19곡을 쏟아낸 120여분, 관객들은 밤 11시가 넘은 시간에 막차를 놓칠까 분주해 보였지만 하나 같이 흥에 겨운 미소를 품고 있었다.
주사위 모형의 무대 모습. 사진/PAPAS E&M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