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외교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상대가 있습니다. 내가 한 수를 두면 상대가 다음 한 수를 두는 상호작용 속에서 외교는 전개됩니다.”
만주 출신의 세계적인 북한전문가 박한식 미국 조지아대 명예 교수는 외교 관계를 ‘바둑 두기’에 빗대어 설명한다. 경우에 따라 치열한 수 싸움이 필요하지만, 대체로 큰 그림을 그리며 ‘선수’를 둬야 이기는 게 바둑의 세계다. 마찬가지로 외교에서의 선수 역시 자국의 장기적 목표에 부합하되, 상대국에 ‘거부하지 않을 만한 제안’을 함으로써 가능하다. 90년대 서독이 통일이라는 큰 그림 하에 동독에 도움을 제공하며 양보를 받아낸 설득 방식은 이런 ‘선수 두기’의 대표 성공 사례였다.
박 교수는 최근 펴낸 신간 ‘선을 넘어 생각한다’에서 남북관계도 우리 만의 ‘선수 두기’가 있다면 점진적인 평화 해법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선수를 올바로 두려면 어때야 할까. 우선 상대를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북한의 정책과 시스템을 바로 보고, 김정은의 심리에 관해 자세히 분석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러질 못하고 있다. 현실 정치와 언론의 왜곡이 만든 편견, 전후사정과 맥락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저자가 보기에 ‘북한 붕괴론’은 편견의 대표적인 산물이다. 김일성 사망 당시 대다수 전문가들은 북한 정권이 3년 내 붕괴할 것으로 관측했다. 김정일 사망과 고위급 인사의 탈북 사건, 대북제재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국가 시스템 자체가 무너지는 법은 결코 없었다. 오히려 오늘날까지 굳건하게 존속되고 있다.
저자는 “북한은 항일 무장투쟁을 지도한 김일성 주석과 조선 노동당, 외세에 맞서 자주성을 지키는 것에 정통성을 두고 있는 국가”라며 “단순히 경제가 어렵거나 지도자가 사망했다는 이유 만으로 무너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붕괴론’에 대한 지나친 믿음이 외교정책 결정자들의 눈까지 흐려놓았다”고 설명한다.
그는 북한 지도자들을 ‘미치광이’라고 보는 시각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뜬금없는 핵실험과 군사 도발, 외국인 억류 등의 사건들은 겉으로 보기엔 1인 독재자가 펼치는 ‘비상식적 현상’이다. 하지만 50여차례 북한을 드나든 저자는 김정은을 ‘악마화’ 하는 편견에 휩쓸려 정작 그 비상식적인 현상의 이면을 보려는 우리의 노력이 부족했을 수 있음을 경고한다.
대표적으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는 우리 측에선 비상식적인 행동이지만 북한 측에선 합리적 사고의 결과였다. 저자는 그 원류를 1975년 “석유와 원자탄이 없으면 국제 사회에서 알아주지 않는다”고 김일성에게 얘기한 마오쩌둥의 말에서 찾는다. 한국전쟁부터 계속된 미국의 핵폭탄과 고립 위협이 북한에게 핵 실험을 안전을 담보하는 최후의 ‘보루’로 작용하게 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저자는 오토 웜비어 사건과 관련해서는 북한의 자존심 문제를 읽는다. 당시 북한 측은 웜비어의 ‘사면’을 위해 중량감 있는 미국 측 인물의 방북과 사과를 원했지만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과의 교섭 자체를 하지 않으려 했다. 결국 웜비어는 건강 상태 악화로 본국으로 송환된 지 6일 만에 사망하게 됐다. 무조건적인 ‘대화 단절’이 오히려 미국 측에 불리하게 작용한 경우다.
북한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우리나라의 대북정책 실패와도 자연스레 연결되는 문제다. 박 교수는 지난 9년간 북한과의 대화 자체를 포기한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이 완전한 ‘패착’이었다고 규정한다. 대화 자체를 포기한 북한은 핵개발을 가속화했고 나머지 강대국들 사이에선 ‘코리아 패싱’이 대두됐다.
기다리면 자연히 흡수 통일이나 유리한 협상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안보 위기’만 대두될 뿐이었다. 저자는 바둑으로 치면 “포석도 없고 판세를 읽는 눈도 없던 ‘줄바둑’에 불과했다”고 두 전직 대통령을 비판한다.
그렇다면 향후 한반도 평화를 위한 ‘선수’란 무엇일까. 저자는 ‘조건 없는 대화’를 우선에 둔다. 비핵화를 대화의 선결 조건으로 내세우고 고집부리기 보단 대화의 결과로 인식하는 게 현실성이 있다는 판단에서다. 우선 협상 테이블로 이끌고 그들의 심리와 요구 사항을 제대로 들어주는 것에서부터 현 정부의 ‘평화 독트린’이 탄생할 수 있다고 그는 분석한다.
박 교수는 지미 카터 미국 전 대통령, 덩샤오핑 전 중국 국가 주석과의 친분으로 미국과 중국, 남북의 가교 역할을 하며 지난 50년을 살아온 인물이다. 평양을 50차례 방문한 탓에 ‘색깔론’에 휘둘리기도 했지만 북한을 연구하는 것이 ‘한반도 평화’를 위한 일이라 여기고 한 길을 걸어오고 있다.
그는 “국공내전, 한국전쟁을 몸소 체험하며 ‘전쟁 없는 세상을 어떻게 만들까’ 평생을 고민했다”며 “남북이 한 지붕에 있되, 각자의 다른 이념과 체제, 제도, 생활방식을 존중하며 사는 방식으로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 이를 나는 ‘변증법적 통일론’이라 칭한다”고 말한다.
책 '선을 넘어 생각한다'. 사진/부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