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대공황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2029년 미국이 망한다. 전조는 있었다. 2001년 9·11테러에 이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4년 인터넷 인프라가 마비되는 스톤에이지 사건까지. 수많은 연쇄 충돌 사고와 비행기 참사·열차 사고 등이 잇따르고 국민들은 심각한 물 부족 사태와 실업난으로 고통 받는다. 하지만 미국이 사상 최악의 참사를 겪는 것은 2029년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한 금융 쿠데타 때문이다. '방코르'라는 새로운 기축통화가 달러를 대체하면서 '달러의 몰락'이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들어냈다. 하룻밤 새 달러가 휴지 조각이 되고, 물가는 치솟고, 물 부족에 재활용수로 샤워는 일주일에 한 번만 해야 하는 상황.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소설 <맨디블 가족>은 '경제대국 미국이 망한다면' 이라는 가정법으로 씌어진 이야기다. "미국이 망할 수 있을까, 세계경제를 쥐락펴락 하는 미국이 경제 위기 늪에 빠진다면, 전지전능한 달러가 휴지조각이 되는 날이 온다면?" 향후 수십년 내에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펼쳐낸 이 소설 속에 주인공은 단연 '달러'다. 기축통화 달러가 '방코르'라는 새로운 기축통화로 대체됐을 때 주저 없이 무너지는 미국의 민낯을 보여주는, 상상소설이라고 하기엔 예언소설의 그림자도 살짝 드리운다.
사실 미국이 금융시장과 통화정책의 주도권을 지금까지 공고히 유지해 온데는 '달러'라는 기축통화의 힘이 크다. 실제 미국은 경제상황이 힘들 때마다 주기적으로 평가절하를 시도해 환율전쟁을 일으켜왔다.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항상 이 싸움에서 이유도 없이 졌고, 지고도 진 줄 몰랐다. 가까운 나라의 예를 봐도 황금기를 누렸던 일본이 잃어버린 10년, 20년, 아니 현재까지 이어지는 경제 불황으로 고생한 데는 '달러 가치를 하락시키고 엔화 가치를 높이는' 플라자 합의가 촉발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환율전쟁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선포한 무역전쟁이 달러 약세와 맞물려 환율전쟁의 방아쇠를 당기고 있다. 특히 중국과 미국의 무역갈등은 우리나라의 환율 변동성을 높이는 주된 결정요인이 될 수 있어 외환당국의 적절한 개입이 필요한 상황이다.
문제는 미국이 외환시장 개입내역 공개를 노골적으로 압박하고 있다는데 있다. 미국은 1년에 두 번씩 발표하는 환율보고서에서 그간 우리나라를 5번이나 관찰대상국으로 지정했다. 환율조작국 지정은 피했지만 매번 불안해하면서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그간 개입내역 공개를 꺼렸던 정부도 공개하겠다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외환시장 개입 내역 공개가 국제사회의 흐름이라는 이유를 대면서다. 결국 김동연 경제부총리는 최근 미국을 방문해 관련 내용을 미국과 조율했다. 그리고 조율결과는 조만간 발표될 것으로 보인다.
이제 한국 정부는 확실히 환율시장 대처 능력에 제한이 생기게 될 것이다. 국내 외환시장은 개방성이 높고 경제의 대외 건전성 수준이 높아 여건 변화에 따라 투기적 공격에 취약한 시장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결국 급격한 환율 변동이 발생할 경우 움직일 수 있는 폭이 줄어들 것은 확실하다. 정부가 외환시장 개입공개를 이미 결정했다면 공개수위 만큼은 가능한 유리하게 조율하기 바란다. '환율주권'을 당당히 지키는 전략적 방어를 꾀해 우리가 하는 것은 환율 조작이 아니라 환율안정정책임 임을 강조해 한국의 외환시장 특수성이 감안되도록 말이다.
김하늬 경제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