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익도의 밴드유랑)'김페리'가 그린 '도시 청춘'의 좌절과 희망

입력 : 2018-05-24 오후 6:20:15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인디씬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를 가득 메우는 대중 음악의 포화에 그들의 음악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죽어버린 밴드의 시대'라는 한 록 밴드 보컬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 ‘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23일 찾은 홍대 '걷고 싶은 거리' 입구에 세워진 이정표 모습. 사진/조은채 뉴스토마토 인턴기자
 
“글쎄요…홍대에 있는 그… ‘걷기 싫은 거리’에서 뵐까요?”
 
홍대의 ‘걷고 싶은 거리’는 싱어송라이터 김페리에게 그저 ‘걷기 싫은 거리’다. 싫증날 정도로 똑같은 버스커들과 거기서 거기인 음식점들, 헌팅을 목적으로 우르르 몰려다니는 사람들이 뒤범벅 돼 있어서다. 덕지덕지 치장하고 화려한 듯 보이지만 실상은 엉성하고 푹 꺼질 거품 같은. 이러한 이유로 그는 홍대를 찾을 때면 줄곧 이 거리 앞에서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고 만다.
 
23일 오후 5시반 이 곳에서 만나 함께 버스커들을 지켜 보던 그는 역시나 인상을 한껏 찌푸렸다. “올 때마다 그리 좋은 인상은 못 받아요. 주말 밤이건, 평일 밤이건 다 너무 똑같은 레퍼토리거든요. 평소 이 곳 말고도 ‘도시 번화가’에 대한 염증이 좀 있는 편이에요. 누군가는 ‘프로불편러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오히려 묻고 싶어요.” “‘어떻게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게 다 똑 같은 거죠?’라고…”
 
홍대 '걷고 싶은 거리'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김페리. 사진/조은채 뉴스토마토 인턴 기자
 
지난 23일 발매된 그의 솔로 1집 ‘다면체의 도시’는 이러한 사고 회로로부터 나온 결과물이다.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도시’로 설정하고 그 곳에서의 천태만상을 관찰했다. 관찰은 대체로 그 스스로의 번민과 성찰에 기반한 것이다.
 
“앨범을 기획할 때 ‘나’ 다운 게 뭔가를 생각하다가 제가 살고 있는 아주 익숙한 공간에서 출발하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도시’라는 주제였고 거기서부터 관찰하고 느낀 감정을 끌어냈죠. 결국 제 이야기이자 제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라 보시면 될 것 같아요.”
 
타이틀 곡 ‘밤의 거리’는 홍대의 밤 거리를 떠올리며 쓴 곡이다. 누가 더 소리를 크게 내는지 대결하는 듯 보이는 버스커들과 춤추는 댄서들, 그 사이로 길게 늘어선 헌팅 술집의 행렬들. 주말이건 평일이건 반복되는 유흥 속에서 그는 황량함을 느낀다.
 
그런가 하면 ‘잠 못 드는 서울’에서는 밤 늦게까지 불 켜져 있는 수많은 빌딩을 보며 자신의 꿈과 현실에 대해 고뇌하고, ‘거품이 움직이는 도시’에서는 비트코인 광풍에 인간의 삶 자체가 뿌리째 흔들리는 광경을 풀어내기도 한다.
 
김페리 솔로 정규 1집 '다면체 신도시' 앨범 커버. 사진/김페리
 
하지만 곡에 비판적 관찰이 있을 뿐, 누군가를 가르치려 드는 계몽적인 음악은 아니라 선을 긋는다. “‘우리 이렇게 살지 맙시다’라고 어느 뻔뻔한 정치인처럼 하려는 건 절대 아니에요. 그저 우린 싫지만 이렇게 살고 있구나, 라는 식의 성찰이고 자조적인 느낌에 더 가깝죠. 그래서 곡에서도 표현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는 않아요.”
 
어떻게 보면 ‘힘 빠지는 음악’으로 들릴 수 있지 않냐는 물음에 그는 웃으며 애초에 그렇게 생각하고 만든 게 맞다고 동의했다. ‘힘 빠지는 음악’을 해서 그럼 얻는 게 뭐냐고 묻자 밝게 웃으며 ‘친구’에 빗대 설명해준다.
 
“사실 상담을 하러 친구를 만나도 우리가 명쾌한 해답을 바라고 가는 건 아니잖아요. 두런 두런 얘기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거죠. ‘어? 너도 그랬어? 나도!’, ‘너도 그렇게 살았구나! 나도 그렇게 살았는데 어머어머’ 그렇게 하면서 위로 받고 하는 거 아니겠어요? 비슷한 거죠!”
 
홍대 '걷고 싶은 거리' 인근 카페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김페리. 사진/ 조은채 뉴스토마토 인턴 기자
 
‘도시’에서 시작하는 앨범의 큰 줄기는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에 관한 이야기로 갈래가 나뉘어진다. 특히 앨범 말미에 위치한 ‘비보’와 ‘노래’는 음악을 관두는 주변 동료, 꿈을 꾸고 좌절하는 ‘미완의 청춘’을 생각하며 쓴 곡이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남과 다르게 살면 ‘틀리다’란 문화가 있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미디어에 노출되는 음악 말고는 잘 찾아 듣지 않는 현상도 그런 정서가 일부 영향을 미쳤을 거라 생각해요. 그런 어려운 환경 탓인지 재능 있는 주변 친구가 갑자기 음악을 그만 두는 경우도 많아요. 어떻냐고요? 쓸쓸하죠…”
 
동료들만큼이나 그에게도 음악이 주는 고민의 무게는 크다. 하지만 그럼에도 ‘반짝이는 여러 순간들’을 떠올리며 그는 이겨낸다. 중학교 시절 천계영의 만화 ‘오디션’의 달봉이가 되고 싶어서 기타를 잡았던 기억, 군 시절 뇌수막염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음악을 평생의 업으로 결정하게 된 기억, 인디 밴드 맨(MAAN)과 차이나몽키브레인에서 개성 넘치는 기타리스트로 활약했던 기억, 그리고 자신을 도와주는 수많은 뮤지션 동료들과 응원해주는 친구들.
 
“뇌수막염에 걸렸을 때 1주일 만에 병원에서 눈을 뜨고 느낀 건 삶에 대한 ‘허무감’이었어요. 내일도 살고 모레도 살고 다음주에도 살아있을 줄 알았는데 사실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그 전까지 음악을 생계와 연관 지어서 재고 따졌는데 그 후로 자퇴하고 바로 결심을 했었어요. ‘할거면 확실하게 하자’고 지금도 늘 생각해요.”
 
23일 홍대 '걷고 싶은 거리'에서 만난 그는 이 거리가 정말 '걷기 싫은 거리'라며 의문의 제스처를 취해주었다. 사진/조은채 뉴스토마토 인턴 기자
 
가사는 대체로 아련하고 쓸쓸하지만 이를 담아내는 사운드는 밝고 청량하다. 기타와 드럼, 베이스, 일렉트릭 건반, 오르간, 패드 등이 결합돼 완성된 사운드는 특정 장르로 설명하긴 어렵다. 그는 “그래도 굳이 이야기하자면 노르웨이 인디 밴드 ‘보이파블로’나 캐나다의 인디 팝 밴드 ‘올웨이스’ 등이 하는 ‘쟁글 팝’에 가깝다”며 “스스로는 ‘스펙터클 해바라기 살랑살랑 인디 팝’이라고 말하고 다닌다”고 웃으며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김페리의 음악을 여행지에 빗대달라는 질문에 잠시 고민하더니 말을 잇는다.
 
“흠 여행지요? ‘번화가’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일단 홍대에서 들으셔도 좋겠고요, 라스베이거스도 좋아요. 아님 제가 사는 수원 인계동도? 한번 추천해봅니다. 하하하.”
 
“제 이번 앨범은 도시에서 사는 청춘의 삶이 ‘이렇다’는 하나의 그림인 것 같아요. 그래서 들어 보시고 각자 ‘자기만의 도시 그림’을 그려 보시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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