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오늘 대법관으로서의 임기를 마치고 법원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소중한 자리를 마련하고 참석해 주신, 존경하는 대법원장님을 비롯한 동료 대법관님, 그리고 후배 법관 및 직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랜 기간 법관으로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사랑하였던 법원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새삼 교차하는 감회에 젖게 됩니다. 법복을 벗으면서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다는 홀가분함이나 안도감에 앞서, 사법부의 어려움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퇴임하게 되어 마음이 착잡하기만 합니다. 특히 제가 법원행정처장으로 재직하던 시기에 저의 부덕의 소치로 인해 법원 가족은 물론 사법부를 사랑하는 많은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린 점에 대해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서정주 시인의 시‘국화꽃 옆에서’의 한 소절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은 심정으로 지난 재임기간을 회고해 봅니다.
제가 6년 전 대법관으로 취임할 때 이 자리에서 ‘법관 임용시의 초심으로 돌아가 인간 존중을 바탕으로 아무리 작게 보이는 사건이라도 당사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억울함이 없는지 그들의 시각에서 다시 생각하며 합당한 결론을 도출함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겠다. 그리고 소수자나 사회적 약자의 권리가 다수의 의사라는 이름 아래 부당하게 침해되지 않도록 그들의 정당한 이익을 보호하는 데에도 최선을 다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저는 대법관으로 재임하면서 그때의 다짐처럼 초심을 잃지 않고 나름대로는 열과 성을 다한다고 하였습니다만, 저의 인간적인 한계로 우리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는 판결을 많이 남기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다양한 가치관이 혼재하고 그 가치관 또는 이념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깊어지고 사회변동성이 큰 우리 사회에서 대법원의 역할은 실로 중대합니다.
저는 대법원이 구체적 분쟁에서 법률의 해석⋅적용을 통하여 무엇이 법인지를 선언함으로써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되 그것이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고 우리 사회를 통합시키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대법원은 변화하는 시대적 흐름과 함께 주권자인 국민의 참된 의사가 어디에 있는지를 탐구하여 반영해야 함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대법원은 사회의 급격한 변동에도 흔들리지 않고 사법부의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을 지키며 국민의 기본권보장의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한다는 명제 또한 오늘의 우리 사회에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제가 관여한 모든 판결에 대하여는 지금은 물론 향후 학문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비판과 평가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 제가 짊어져야 할 몫입니다. 혹여 저의 조그마한 공(功)이라도 있다면 대법원의 모퉁이 초석 아래 터파기 작업에 들어간 한 개의 잡석이 되고자 노력한 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평소 바람직한 법관직은 모름지기‘반은 성직자, 반은 교수’이어야 하므로, 법관은 훌륭한 인품과 풍부한 법률지식을 추구하고 세속적인 즐거움과는 다소 거리를 유지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왔습니다. 지난 34년간의 저의 법관생활을 돌이켜 보면, 저 스스로는 절제된 삶을 살려고 애쓰고 정의에 합당한 결론을 내리기 위하여 긴장과 고뇌, 외로운 결단이 연속되는 삶을 살아 왔습니다만, 늘 한없이 부족한 사람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후배 법관 여러분은 법관으로서의 한평생 삶과 판결이 또 다른 후배들에게 존경과 감탄이 일어나도록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요사이 법원 안팎에서 사법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내리고 사법권 독립이 훼손될 우려에 처해 있다고 걱정하는 소리가 높습니다. 이 부분 이야기에 이르면 저로서는 말할 자격이 없음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더욱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사법의 권위는 국가경영의 두 영역 중 이른바 ‘위엄의 영역’에서 필수적입니다. 사법의 권위가 무너진 곳에서는 법관들이 재판업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렵습니다. 늦었지만 사법 권위의 하락이 멈춰지고 사법에 대한 신뢰가 더 이상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막아야 합니다. 내부의 잘못으로 허물어진 부분은 다시 일으켜 세우고 국민들과의 사이에 깊게 파인 골은 메워 나가야 합니다.
저는 떠나가지만 남아계시는 여러분들께서 지혜를 모아 사법부의 독립을 지켜 주시고, 아울러 무너진 사법의 신뢰를 되찾아오도록 노력해 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 드립니다.
친애하는 후배 법관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에게 어려운 시기일수록 사법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라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사법 본연의 임무는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각종 권력에 대한 사법적 통제를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법관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러한 소임을 다할 때 국민들로부터 신뢰와 사랑을 받는 사법부가 될 것입니다. 특히 판사는 판사가 된 그 자체에 가장 큰 의미를 두어야 합니다. 그 이상 무엇이 되고자 한다면 판사로서의 다른 행복을 놓칠 수 있습니다. 재판업무이외에 사랑과 소통으로 동료 선·후배 사이의 인간관계도 중시하며 행복을 추구하십시오. 우리가 몸담고 있는 법원은 다른 어느 직장보다도 구성원들이 서로 아끼고 보살피는 아름다운 공동체라는 점이 떠나갈 때에야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뛰어난 실력과 훌륭한 인품을 지니신 대법관님들과 함께한 6년은 저에게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서 있기까지에는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제가 대법관으로 근무하는 동안 저를 도와주신 이명철 부장판사님을 비롯한 전속조와 공동조의 재판연구관들, 그리고 김규현 비서관님을 비롯한 역대 비서실 직원 여러분들의 헌신적 노고에 감사드리고, 여러분과 함께한 시간들을 좋은 추억으로 오래 오래 간직하겠습니다. 특히 제가 법관으로 근무하는 동안 재판업무를 도와주셨던 수많은 법원직원들의 노고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법부의 무궁한 발전과 아울러 법원 가족 여러분 모두의 가정에 행운이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감사합니다.
2018. 8. 1.
대법관 고 영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