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동남아 휴양지로 여름휴가를 다녀온 지인에게 어땠냐고 물었다. 싱싱한 해산물, 깔끔한 리조트 등을 상상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길이 울퉁불퉁해 유모차 끌고다니기 너무 힘들었다”였다. 그는 보도블록이 엉망이라 거의 유모차를 들고다니다시피 했다고 털어놓았다. 불과 몇 달 전 그 나라를 다녀왔지만, 느끼지 못한 것들이었다. 서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이 달라진다더니 유모차를 끌어본 경험이 없다면 보지 못하는 풍경이다.
몇 년 전 휠체어와 목발 신세를 진 적이 있다. 실제 입원은 일주일 남짓, 나머지 회복까지도 그리 긴 기간은 아니지만, 돌이켜보면 외부와 단절된 기간으로 기억된다. 버스·지하철 같은 대중교통 타는 건 땀을 뻘뻘 흘릴 정도의 일이었다. 목발로는 집 앞 슈퍼마켓 가는 것도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계단만 보면 한숨부터 나올 지경이니 지인과의 중요한 약속도 미룰 수 밖에 없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하루종일 휠체어를 탄다고 했다. 확인해보니 장애인뿐만 아니라 노인 등 보행약자들의 이동권 문제를 체험할 계획이다. 누군가는 ‘쇼맨십의 제왕’이라며 비아냥 가득한 반응을 보였다. ‘삼양동 옥탑방으로 재미보더니 체험만 하다 임기마칠 모양’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표퓰리즘’, ‘보여주기식 행정’ 등 늘 말은 말을 만들기 마련이다.
지난 4일 오후 서울지하철 1호선 시청역에선 작은 소동이 빚어졌다. 열차가 도착하자 장애인인권단체 소속 장애인들이 승하차를 세 차례 반복하며 열차 출발이 10분가량 지연됐다. 지난해 10월부터 매주 화요일 오후 진행하는 ‘지하철 그린라이트’ 퍼포먼스다. 그린라이트는 ‘허가’라는 뜻으로, 지하철 그린라이트는 장애인도 안전하고 편리하게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지난해 10월20일 고 한경덕 씨가 1호선 신길역에서 지하철 리프트를 타려다 계단 아래로 떨어져 중상을 입고 98일간 사경을 헤매다 사망했다. 그 후 1년이 다 되가지만 여전히 성신여대입구역은 승강장과 전동차 간 간격이 넓어 휠체어 바퀴가 빠질 정도이며, 충무로역은 경사가 가파르고 높이가 상당해 놀이기구를 타는 느낌이 들 정도다.
박 시장이 처음 삼양동에 갔을 때도 여러 얘기가 나왔다. 한 달이라는 기간이 충분한가, 왜 삼양동이냐, 저소득층의 삶이 체험으로 될 일인가. 한 달이 지났고, 적어도 박 시장 임기 중엔 가장 더운 한 달이었다. 그리고 박 시장의 한 달은 경전철 재정사업 전환, 빈집 대책, 골목경제 활성화, 공공기관 이전 등 지역균형발전 정책 구상으로 탄생했다.
지하철 그린라이트에서 한 활동가는 말했다. “박 시장이 하루 경험한다고 장애인이 일상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을 완전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체험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박 시장, 아니 보다 많은 단체장들이 적어도 1년에 한 번 정도는 장애인 체험을 했으면 한다. 휠체어는 물론, 시각·청각 등 다양한 장애의 불편함을 안다면 조금은 달라질 것이다. 나아가 유모차 체험, 임산부 체험 체험만으로도 시각이 달라질 분야는 많다. 쇼는 계속돼야 한다.
박용준 사회부 기자 yjunsay@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