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촉한 도전과 자유의 노래…이장희의 황혼은 아름답다

3월8~9일 LG 아트센터서 단독 공연…”황혼녘 복잡다단함, 노래로 만드는 게 꿈”

입력 : 2019-02-14 오후 3:28:14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내 나이 육십하고 하나일 때'는 가수 이장희가 꽃다운 청춘 때 쓴 곡이다. 1974년 동아방송 DJ 활동 시절 대학 축제용 곡 청탁이 왔고, 2시간도 안돼 술술 써 무대에 섰다. “많은 분들이 40대 초반 쓴 곡이라 알고 있지만 사실 그 곡은 28세에 썼습니다. 당시엔 녹음도 하지 않고 무대에서 한번 부르고 말았지만요. 허허.”
 
‘내 나이 열하고 아홉 살’로 시작하는 노랫말은 ‘육십하고 하나’까지의 자유와 낭만을 구술한다. 가슴 속 늘 꿈이 가득했었고, 넘쳐 흐를 것이며, 남아 있을 거라고 되뇌던 그의 생에 관한 노래다. 지난 13일 서울 중구 달개비에서 만난 뮤지션 이장희(73)는 세월의 나이테를 묻혀 이 질곡의 세월들을 하나, 둘 굽어보고 있었다. 이제는 노랫말의 세월을 훌쩍 뛰어 넘어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밝았고, 유쾌했으며, 에너지 넘치는 낭만 가객이었다. 쩌렁쩌렁한 발성 덕에 마이크도 제쳐두고 자신을 소개했다.
 
기타리스트 강근식(왼쪽부터)과 가수 이장희, 베이시스트 조원익, 사진/PRM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래된 가수 이장희입니다. 72년부터 75년까지 아주 짧게 음악활동을 했습니다.”
 
그를 두고 대중들이 가장 많이 떠올리는 단어는 ‘쎄시봉’이다. 1960년대 서울 무교동 음악다방이었던 이 곳을 아지트 삼아 그는 송창식, 조영남, 윤형주 등과 어울려 통기타 1세대로 활약했다. 이후 1971년 DJ 이종환의 권유로 가요계에 정식 데뷔했다.
 
번안곡이 주를 이루던 당시 그는 자작곡에 도전하며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했다. 포크와 록을 넘나드는 멜로디와 감성적인 노랫말은 엄혹한 시대를 살던 당대 젊은이들을 위로하고 흔들었다. 콧수염, 오토바이, 통기타는 그의 표상이었고, ‘그건 너’, ‘한잔의 추억’,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등 대표곡들은 많은 사랑을 받았다.
 
가수 이장희. 사진/PRM
 
“저는 당시 새로운 것을 해봐야겠다 하는 생각을 많이 하곤 했습니다. 음악도 그렇고, 가사 내용도 당시의 가수들이 쓸 수 없는 노래를 많이 써보려고 했어요.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는 영화 테마곡으로도 쓰였고, ‘한 소녀가 울고 있네’에는 사이키델릭한 요소도 들어갔었죠. 대부분 일정한 형식을 갖추던 노래들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가사의 경우 그는 당시 주류였던 시어체 형식도 탈피하려 했다. “당시 가요보다는 팝 음악을 밤새 듣곤 했습니다. 들으면서 느꼈던 건 외국에는 ‘Hey’ 하고 시작하는 일상적인 말들이 가사가 되는 것이 신기했어요. 그때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흘러가는 구름’처럼 감상적인 시어체가 가사의 주를 이뤘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국내 최초로 구어체 가사를 음악에 도입한 사람인 건 맞는 것 같습니다.”
 
'동방의 빛'의 연주 모습. 사진/PRM
 
그의 곁에는 음악적 동료 기타리스트 강근식(73)·더블 베이시스트 조원익(72)이 있었다. 셋은 ‘동방의 빛’이란 명의 밴드를 결성, 이장희가 대마초 파동에 연루돼 가요계를 떠나는 시점까지 활동을 함께 했다. 20살 열혈 청년이었던 그들은 밤새 음악을 듣고 얘기하며 우정을 나눴다. 이날 모임에 참석한 두 동료는 “팔팔하던 때였다”고 당시를 회상하며 “판(LP)구하기 힘든 시절, 음악으로만 우정이랄까, 친구랄까가 됐다”며 멋적게 웃었다.
 
국내에 대마초 파동이 불던 1975년 12월5일을 끝으로 ‘동방의 빛’은 해산됐으나 셋은 ‘우연히’ 헤어지고 만나지기를 반복했다. 미국에서 라디오 방송과 음반제작 등 사업을 하던 이장희는 1997년 울릉도에서 살기 시작했고, 10년 뒤 두 친구도 따라왔다. 지난해부터는 이장희 집 앞 뜰에 문화시설 ‘울릉 천국 아트센터’가 지어져 이 곳에서 함께 음악을 만들고 공연도 한다. 
 
“50년씩이나 음악을 함께 해 온 이들은 아마 저희가 유일할 겁니다. 흔히 좋은 친구라 하면 대화가 통하기 때문이라고 하잖아요. 근데 우리는 대화가 필요 없는 정서적 교류 같은 게 있습니다. 말이 필요 없이 누가 이런 소리를 내면 다른 친구는 또 다른 소리로 받고. 또 셋 모두 술을 좋아해서 공연을 끝내고 나면 한 잔 하며 울릉도 석양의 아름다움에도 취하곤 합니다. 하하하”
 
울릉도의 노을은 ‘인생의 황혼기’를 맞닥뜨린 그를 종종 비춰주곤 한다. “이제 제가 인생의 황혼 아니겠습니까. 황혼이라 하면 붉고 아름답고 안온한 행복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쓸쓸하고 허무한 느낌도 드는 게 사실입니다. 복잡다단함이죠. 그런 마음을 노래로 표현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제 주특기가 책상에서 가사 써서 노래하는 거니 그걸 해야겠다는 게 지금의 꿈입니다.”
 
가수 이장희. 사진/PRM
 
그의 삶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거대한 줄기는 자유에 대한 거침없는 도전이다. 다양했던 음악적 도전만큼이나 그는 삶에서도 자유를 꿈꿨고 도전에 스스럼없이 맞닥뜨렸다. 음악을 중단한 뒤 광화문에서 옷가게, 미국에선 식당, 방송국을 운영해봤고 틈틈이 대자연을 위한 여정을 떠났다. 알래스카와 남극을 거쳐 울릉도에 정착해 농사를 지었고 실패해보기도 했다. 그는 도전조차 힘들어진 오늘날 세상에 “제가 대단한 사람이 아니어서 얘기하긴 그렇다”면서 “하지만 학창시절부터 ‘비켜라!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한다’는 신조는 있었다. 누구든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결정하는 것인 만큼 스스로 의지를 갖고 실행에 옮겨 본다면 도움이 될 수 있다 생각한다”고 얘기했다.
 
또 최근 젊은 뮤지션들이 자신의 노래를 재해석해 부르는 것과 관련해서는 “제가 하는 음악은 시대의 흐름을 타고 넘어가는 유행가였기에 요즘 젊은 분들이 좋아할까 싶은 마음도 있었다”면서도 “하지만 젊은 친구들이 노래하는 걸 보면 정말 프로페셔널하게 잘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훌륭하고 발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고 답했다.
 
지난해 7월 말부터 8월까지 한 달간 울릉도에서 했던 공연을 이번엔 서울에서 이어간다. 3월8~9일 LG 아트센터에서 ‘나 그대에게’라는 타이틀로 단독 콘서트를 열 예정이다. 2013년 이후 6년 만의 공연으로 70년대 향수를 느낄 수 있는 곡들부터 ‘사랑과 평화’, 김태화 등 직접 제작에 참여했던 노래까지 들려줄 계획이다. 
 
이날 인터뷰에 앞서 그는 '내 나이 육십하고 하나일 때'와 ‘그건 너’를 불렀다. ‘마이크 첵 원투’ 하며 음 튜닝을 하더니 “톤을 맞춰보자”고 친구들과 웃었다. 곧바로 그가 기타를 45도 각도로 치켜들 때 청춘 감성을 촉촉히 머금은 자유와 낭만의 언어들이 삶의 시계를 50여년 전으로 되감고 있었다.
  
'동방의 빛' 연주 모습. 사진/PRM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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