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북미정상회담에 관한 협의를 위해 부산으로 온다던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의 방한이 취소됐다. 연합뉴스는 볼턴이 베네수엘라사태에 집중할 것이라는 미국 국무부의 설명을 전했다. 그러던 그가 27~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북한과 미국의 정상회담에 나타났다. ‘악의 화신’이라 불리는 그가 한국과의 협의를 마다하고 하노이에 등장한 모습을 보고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불길한 느낌은 모두 현실로 드러나고 말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제2차정상회담이 결실 없이 끝난 것이다. 정상회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볼턴이 어떤 말과 역할을 했는지는 아직 정확하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트로이 전쟁에서 트로이군과 아테네군의 종전맹약을 방해하기 위해 화살을 날린 판다로스와 같은 역할을 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아니면 전쟁을 평화적으로 끝내려고 하는 제우스의 뜻을 방해하고 그리스군을 부추기던 헤라 여신과 아테나 여신처럼 행동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 하노이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은 상당한 기대를 걸었던 것 같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평양에서 대대적인 환송인사를 받으며 출발하고 열차로 중국대륙을 관통해 하노이까지 갔다. 북한이 전세계를 향해 비핵화 장정에 들어섰음을 선언하는 모양새였다. 반면 북한은 미국의 목표와 계산에 대해서는 다소 안이하게 판단했던 것 같다. 특히 볼턴이 여전히 ‘제몫’을 하고 있음을 가볍게 여긴 듯하다.
미국은 북한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틈을 이용해 보다 엄격한 조건을 관철하려 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북한으로서는 미국의 갑작스런 요구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돼 있었다. 미국도 그 자리에서 무조건 즉시 받아들이라고 강요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하노이 정상회담이 결렬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당일 오후 한국의 주가는 코스피 1.76%, 코스닥 2.78% 하락했다. 특히 남북경협주의 낙폭이 커서 시가총액이 5조6000억원가량 증발했다. 이날 원·달러 환율도 5.6원 상승했다. 아시아와 유럽 및 미국의 주가도 동요했다. 북한과 미국의 하노이 담판에 대한 기대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다행히 회담 결렬 후에도 북한과 미국은 다시 협상테이블에 앉을 여지를 남겨놨다. 그러므로 이번 하노이 회담 결렬로 낙망할 필요는 없다. 북한과 미국 사이의 적대관계와 불신이 워낙 오래됐기에 해소하기는 어차피 쉽지 않다. 북한과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특히 한국전쟁 이후 줄곧 적대관계에 있었다. 상호불신도 극심했다. 지난 1990년대 북한과 미국의 핵협상 진행과 그 이후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그 불신은 더욱 깊어졌다.
모든 사물의 흐름에는 관성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적대관계와 불신도 해소되려면 힘든 고비와 우여곡절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새로운 관계가 수립되고 견고하게 발전할 수 있다. 북한과 미국의 관계도 그렇고, 남북한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한국 정부와 청와대는 하노이 회담을 앞두고 때이른 낙관론에 젖어들었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19일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남북한 경협의 부담을 한국이 짊어질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김의겸 대변인이 북한과 미국의 종전선언 가능성을 시사했다. 모두 김칫국부터 마신 셈이다. 한국의 외교당국자들이 미국의 속마음을 정확하게 읽지 못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특히 대미외교라인이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밝혔듯이 이번 결렬은 더 높은 합의에 이르기 위한 진통으로 이해된다. 평화와 협력의 ‘신한반도체제’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이런 진통을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
남북한 경제협력도 마찬가지이다.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재개는 물론이고 동북아 철도공동체의 건설이나 남북한 경제공동위원회 구성 등 하고 싶은 일은 엄청 많다. 그렇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이런 사업들을 당장 실현하기는 어렵다. 일단 벽에 부딪혔음을 냉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지금 그 무슨 사업을 성급하게 추진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노이 회담의 실패 요인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 그런 다음 새롭고 창의적인 대안을 마련하고 차분하게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이제 북한핵 문제를 원점에서 돌아보고 새로운 각오로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나에게 “굳은 땅에 물이 고인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 말씀처럼 이런 진통을 거치면서 북미관계나 남북한 관계의 바닥부터 다시 다져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