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서윤 기자] ‘사법농단’ 핵심 인물로 지목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의 재판이 장기화할 전망이다. 재판부가 검찰에 공소장 변경을 요구할 예정인 데다, 변호인단이 쟁점과 증거목록 등에 대한 의견서 제출을 한 달이나 미뤘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차기 공판준비기일을 다음달 15일 열기로 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부(재판장 박남천)는 25일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 등으로 기소된 양 전 원장과 박 전 처장, 고 전 처장의 첫 공판준비기일을 열었다. 피고인들은 출석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날 공소사실과 쟁점을 명확히 하고, 증거조사 순서와 방법 등을 확정할 예정이었다. 고 전 처장 측 변호인도 지난 22일 공소장일본주의 위반 관련 의견서를 제출한 바 있다. 재판부는 “변호인 의견도 있었지만, 재판부에서도 보기에 최초 공소사실을 그대로 두고 재판을 진행하기엔 부적절한 부분이 있다”면서 “정식 공소장변경 요구를 서면으로 할 테니 검토해달라”고 검찰 측에 요청했다.
이날 공판준비는 증거조사 관련 논의에서 제동이 걸렸다. 양 전 원장의 변호인인 이상원 변호사는 검찰 측 제출 증거에 대해 “진술조서나 피의자 심문조서 외 ‘법원행정처 심의관 작성보고서’ 등 문건이 많은데 입증 취지가 불분명하고, 각 서류 수집 과정에서 압수수색 영장 등 위법수집여부를 판단할 서류가 제출되지 않았으며, 증거조서나 피의자심문조서에 문답 외 메모나 수첩 내용 등 스캔된 이미지가 포함돼 있어 기존 방식과 다르니 이미지는 삭제하거나 철회해 달라”고 요청했다. 박 전 처장의 변호인인 노영보 변호사는 “수사기록에서 피고인에 유리한 증거는 제외됐다”고 지적했다. 검찰에 따르면, 변호인단은 미리 제출한 의견서에서도 '검찰이 참고인 신분의 법관들을 조사할 때 진술거부권과 변호인조력권을 고지하는 등 피의자로 전환될 수 있다는 압박을 가했다'는 취지의 문제를 제기했다.
검찰은 공소사실이 불분명하다는 변호인과 재판부의 지적에 “피고인들의 공소사실은, 양 전 원장은 2011년부터 6년 재임기간 여러 동기와 목적에 의해 이뤄진 범행이고, 지휘체계와 계통에 따라 공모관계도 다양하고, 은밀히 조직적·반복적으로 이뤄진 성격이 있다”고 해명했다. 변호인단의 증거 관련 지적에 대해서는 발끈했다. 검찰은 “수사기록목록에서 마치 검사가 일부러 서류를 빼돌린 것처럼 주장하는데, 이미 압수조서로 작성돼 첨부됐고 증거로 제출돼 있다. 조사 내용에서 필요한 부분만 추려서 첨부하는 건 통상적이고, 공소사실 관련 없는 모든 자료를 제출하는 건 불필요한 재판 지연과 작성자의 사생활 침해 소지도 있다. 또 조사 대상자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 거부권 등을 고지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변호인의 지적이) 수사에 대한 ‘흠집내기’로 보인다”며 “재판부가 적극 석명권을 발동해 변호인에 확인해달라”고 요청했다.
재판부는 신속한 진행을 강조하며 검찰의 발언을 한 차례 제지하고, 공소장 변경 요구를 하는 데 참고하기 위한 변호인의 공소사실 의견을 바로 제출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노 변호사는 서류 제출기일을 차일피일 미뤘다. 재판부가 4차례 묻고서야 “다음주 화요일”이라고 답했다. 노 변호사는 쟁점 정리에 관한 의견 제출도 순차적으로 내겠다고 했고, 재판부는 이를 승낙했다. 이어 검찰이 제출한 증거목록 중 변호인이 증거채택여부를 밝히는 의견과 관련해 노 변호사는 “최소한 4주를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재판부가 재판 지연 우려를 표하자, 노 변호사는 “지금까지 최대 88회 공판한 사건도 있었다. 1년 9개월정도 걸렸다”고 일축했다.
결국 재판부는 5분간 휴정해 논의한 후 다음 기일을 약 한 달 뒤로 지정했다. 노 변호사는 이마저도 당일 다른 재판이 있다며 변경을 요청했지만, 재판부는 피고인의 변호인 중 다른 변호사도 많고 서면으로도 진술할 수 있다며 기일을 확정했다. 노 변호사는 이날 “재판을 지연시켜 뭘 어떻게 할 생각은 없다”면서 다른 변호사의 만류에도 재판부와 검찰의 신속한 재판진행 요구에 딴지를 거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굳이 공판이 장기화한 사례까지 들어 정당성도 부여했다. 그러나 이날 재판 초반부에 그는 “서증조사를 할 때 아주 길게 하는 경우는 검사가 낭독을 하는 것까지 봤고, 간단히 하는 경우는 목록만 보고 넘기더라”면서 검찰의 서증조사에 대해서만 “시간을 많이 절약하는 방향으로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사법농단의 핵심으로 평가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달 26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보석 심문기일에 출석하는 모습. 사진/뉴시스
최서윤 기자 sabiduria@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