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한영 기자]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후 상황분석을 어느정도 끝낸 한반도 주변국들이 연이은 정상회담에 나서면서 비핵화 협상의 판이 커지는 모양새다. 각국의 이해관계가 각기 다른 가운데, 핵심 당사자인 북한과 미국이 합의할 수 있도록 한국이 역할을 해야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지난 25일 블라디보스토크 극동연방대학에서 열린 북러 정상회담 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6자회담 카드를 거론하며 향후 한반도 문제에 적극적인 중재에 나설 수 있음을 밝혔다. 북한 체제안전 보장 필요성을 밝힌 것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2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대북)제재해제 문제에 더는 집착하지 않을 것" "미국이 지금의 계산법을 접고 새로운 계산법을 가지고 다가서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한 것의 연장선상에 있다. 푸틴 대통령의 단독 기자회견 형식이었지만, 김 위원장과 한반도 문제를 놓고 충분한 논의를 한 것으로 보인다.
푸틴 대통령은 27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일대일로(육상·해상 실크로드) 정상포럼' 방문 결산 기자회견에서는 "러시아와 중국은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구상(로드맵)을 갖고 있다"며 김 위원장과의 북러 정상회담 결과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자세히 설명했다고도 밝혔다. 중국은 지속적으로 북한의 '단계적 비핵화' 방법론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북한과 중국, 러시아 3자 간 비핵화 공동전선이 공고해질 경우 미국으로선 그만큼 향후 협상 과정에서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기존 남북미를 중심으로 이뤄지던 비핵화 대화 과정에 '플레이어'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 대화 속도는 늦춰질 가능성이 커졌다. 북미 정상 간 '탑다운' 방식의 비핵화 해법을 모색해온 북한이 러시아, 중국과의 접촉면을 넓히는 것을 놓고 북미대화 교착상태가 생각보다 길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그래서 나온다. 북한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판문점 선언 1주년인 27일 "미국은 남조선당국에 '남북관계가 미조(북미)관계보다 앞서가서는 안 된다'는 속도조절론을 노골적으로 강박하면서 북남관계를 저들의 대조선 제재압박 정책에 복종시키려고 책동하고 있다"며 공세에 나섰다. 북한 고위당국자들은 미국 측의 실무협상 제안에 답을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문재인 대통령의 북미대화 중재를 어렵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문 대통령이 이달 초 한미 정상회담에서 조만간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할 계획을 밝혔지만 개최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의 '빅딜' 요구와 북한의 단계적 비핵화 사이에서 우리 정부는 '굿 이너프 딜(충분히 괜찮은 거래)' 카드를 꺼내들었지만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는 얼마 전 "사실 중간단계가 뭔지 나는 모르겠다"며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다만 북미 양측 모두 정상 간의 신뢰가 살아있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대화 여지는 계속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거 정전협정 체결 당사국 참여여부와 한반도 내 군대 주둔상황 등을 고려했을 때 러시아와 중국, 일본 등이 비핵화 대화에 참여할 공간은 적다는 의견도 나온다. 조성렬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핵심적인 비핵화 당사자인 북한과 미국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며 "이 과정에서 한국이 제3의 방안을 내놓는 역할을 해야한다"고 설명했다. 북미대화의 문이 닫히기 전 '포괄적 합의와 단계적 이행'을 큰 틀로 하는 한국형 비핵화 모델 구축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완전한 비핵화와 한반도에서의 항구적인 평화 정착을 위한 노력을 지속하겠다는 방침을 수시로 이어가는 중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이 지난 26일(현지시간) '일대일로(육상·해상 실크로드) 정상포럼' 참석을 위해 중국 베이징을 방문 중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최한영 기자 visionchy@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