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 꽃이 피어 오래 전부터 자등(紫藤)으로 불렸다는 등나무, 그 아래에 앉으니 등꽃이 봄바람에게 속삭이는 말이 들려오는 듯하다. 자신의 역할은 사람들과 세상 여기저기에 짙은 향기를 전해주는 것이라고. 그렇게 시간은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저 보랏빛 등꽃이 사람도 벌도 불러 모으는 계절을 지나가고 있다. 5월이 무르익고 있다. 잠시 세상살이의 시름을 잊어버리고 등꽃의 매력에 빠진다면, 그것이 치유(治癒)다. 잠깐 동안의 휴식만으로도 치유(治癒)가 될 것이다.
등나무를 나타내는 한자는 ‘등(藤)’이다. 아쉽게도 ‘등’ 자(字)는 사람들 사이에 목표나 이해관계가 서로 달라 적대시하거나 혹은 충돌할 때 사용되는 ‘갈등(葛藤)’이란 단어를 구성하는 데 쓰이는 글자의 하나다. 갈등에서 ‘갈(葛)’은 칡을 나타내는 한자어다. 산기슭 양지에서 자라며 뿌리를 약으로 쓰기도 하는 바로 그 칡이다.
그런데 어떻게 칡과 등나무가 ‘갈등’이란 단어를 이루게 되었을까. 그런 의문이 드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갈등은 이 양자가 서로 얽혀 있는 자태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니, 참 의아하기도 하고 적잖이 당황스럽기도 하다. 칡은 그 줄기가 왼쪽으로만 기어오르고 등나무는 지주목을 중심으로 오른쪽 방향으로만 자라 오르는데, 문제는 이 두 가지가 서로 만나면 심하게 엉켜서 풀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갈등이란 말이 바로 여기에서 생겨난 것이다. 식물학자 이유미 박사의 저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나무 백 가지'에는 등나무는 오른쪽뿐만 아니라 왼쪽으로 감고 올라가는 것도 있다고 쓰고 있지만, 아무튼 ‘갈등’은 칡과 등나무가 허공을 향해 감고 올라가는 방향성의 차이에서 빚어진 말이다.
이 갈등이란 단어를 놓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왠지 섬뜩한 기분도 든다. 왜냐하면, 칡과 등나무가 독립된 존재로 쓰일 때는 유용하고 아름다운 단어로 인식되는데, 서로 만나 엉키면서는 서로 풀기 어려운 존재로 변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 두 개의 식물로 ‘갈등’이란 단어를 만들어낸 선인들의 조어 능력도 놀라울 뿐이다. 한편으로는 인간 사회에 주는 경고의 함의(含意)인 듯하여, 오싹, 소름이 끼치기도 한다.
그리하여 갈등은, 소설이나 희곡에서는 등장인물 사이에 일어나는 대립과 충돌 또는 등장인물과 환경 사이의 모순을 나타내는 문학 용어의 하나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두 가지 이상의 상반되는 요구나 욕구, 기회 또는 목표에 직면하였을 때 선택을 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심리학의 용어로 정착하게 되는 기구한 운명이 되기도 하였다. 갈등과 비슷한 말로, ‘고민’, ‘다툼’, ‘모순’과 같은 단어들이 떠오르는 것은 그런 까닭에 연유한다. 문학 작품 속에 보이는 갈등의 흐름을 ‘갈등선(葛藤線)’이라 하고, 불교에서 종지(宗旨)를 알지 못하고 말만 번잡한 승려를 비난조로 이르는 말을 ‘갈등선(葛藤禪)’이라고 하는 용어도 갈등을 기반으로 생겨났다.
등꽃 나무 아래에 앉아 그 향기에 묻혀 잠깐 세상 쪽으로 눈을 돌려본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세상살이가 갈등의 계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세상 여기저기에 혼란의 그림자가 짙다. 인간이 별개의 독립된 존재일 때도 아름다워야 하지만, 서로 만나면 더 아름다운 존재로 더 깊은 향기를 뿜어내야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있는 것이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요즘 들어 부쩍 팽배해진 좌우 갈등, 그리고 빈부 갈등, 세대 간의 갈등, 지역 갈등, 남남(南南) 갈등, 남북(南北) 갈등과 같은 말들이 우리의 영혼을 심히 어지럽히고 있다. 동행해야 할 우리의 삶에 장애가 되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어떻게 갈등을 풀어야 할지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커다란 질문이 되고 있다.
계절의 여왕, 5월이다. 등꽃이 봄바람을 불러들여, 자신의 역할은 사람들과 세상 여기저기에 짙은 향기를 전해주는 것이라며 속삭이듯이, 이 계절에는 모든 갈등의 매듭이 풀리는 풍경이 펼쳐졌으면 좋겠다. 갈등 속에서도 인간미 넘치는 훈훈한 이야기가 피어나는 것 또한 세상살이 아니겠는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유형을 일일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삶이 칡과 등나무가 서로 꼬여 있는 형태로 흘러가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볼 일이다.
오석륜 시인/인덕대학교 비즈니스일본어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