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1987년, 자신의 이름 석자를 고이 새긴 첫 음반은 생애 마지막 작품이 되고야 말았다.
국내 대중음악사상 최초로 작사, 작곡, 편곡을 홀로 일궈낸 앨범. '음악적 자주(自主)의 완전한 실현'이라 평가 받는 한국 대중음악사의 위대한 유산. '사랑하기 때문에'.
같은 해 11월1일 25세의 이 청춘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 고결하고 숭고한 아티스트적 자의식 만은 후대 뮤지션들에 의해 계승돼 오고 있다.
'유재하 음악 경연대회'가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 '유재하 음악장학회(유재하 가족들 설립)' 주관으로 1989년부터 열린 이 대회는 한국 대중음악계의 꾸준한 '산실(産室)'로서 자리매김해왔다. 1회 수상자 조규찬부터 유희열, 김연우, 이한철, 루시드폴, 스윗소로우, 방탄소년단(BTS)의 제작자 방시혁에 이르기까지, 이 대회 출신들은 오늘날 세계로 뻗어가는 한국 대중음악의 종 다양성에 기여하며 고인의 정신을 기려오고 있다.
지난 2013년 후원사 부재로 무산 위기까지 갔던 대회는 '동문' 뮤지션들의 자족으로 회생해 오늘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투표 방식으로 그 해 회장을 선출하는 이 동문회는 한 해의 운영 방식을 결정하고, 연말까지 신인 뮤지션을 발굴하는 공식 일정을 진행한다. 지난 2002년 14회 이 대회에서 수상해 뮤지션 재주소년으로, 또 인디레이블 애프터눈레코드 대표로 활동 중인 박경환(36)은 올해 동문회장으로 선출됐다. 그는 "고 유재하의 음악적 자의식은 30년이 지난 오늘날도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숨쉬는 것 같다"며 "그런 정신을 새기며 참가자들이 주체적인 음악가로 성장할 수 있게 커다란 나무의 시원한 '그늘' 같은 역할을 하겠다"고 얘기한다. 지난달 28일 서울 마포구 합정 인근 카페에서 박경환 동문회장을 만나봤다.
지난달 28일 서울 마포구 합정 인근 카페에서 만난 박경환 유재하 동문회장.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싱어송라이터 '산실'로 불리기까지의 30년
1988년 유재하의 유족들은 앨범의 수익금으로 '유재하 음악 장학회'를 설립했다. 이듬해 1회 대회를 개최했고, 이 대회에서 조규찬이 '무지개'란 곡으로 금상을 수상했다. 장학회에서는 입상자에게 상금을 주는 방식으로 2004년 16회까지 끌어왔다. 유희열(4회 대상), 루시드폴(5회 동상), 방시혁(6회 동상) 등이 이 기간 이 대회의 수혜를 입고 뮤지션으로 데뷔했다.
2005년 재정적 문제로 한 해 중단됐으나 이듬해 싸이월드의 후원으로 재개됐고, 노리플라이(2006년 은상)나 옥상달빛 박세진(2008년 장려상) 같은 대중 음악인들을 배출했다. 2013년에도 후원사확보 문제로 개최가 불투명해졌으나, 대회 출신 뮤지션들이 '유재하 동문회'로 똘똘 뭉쳐 위기를 극복했다.
음악을 만들던 이들은 컴퓨터를 잡고 대회 일정을 함께 그렸고, 대회가 열리던 날엔 음향과 무대 스텝으로 발벗고 뛰었다. '자족'으로 고인의 정신을 이어갔던 그 해의 기억을 동문들은 짜릿한 감동으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 동문회장이 이한철 선배였어요. 정지찬, 오지은, 심현보, 스윗소로우 김영우, 루빈 등 선후배들도 카카오톡 방을 열고 '우리가 감당해 보자' 했었고요. 사무적인 일처리부터 홍보, 무대 스텝, CD 판매까지 해가며 대회를 함께 일궜는데, 아직도 잊지 못할 기억이죠. 당시 무대 위에 동문들이 유재하 선배의 곡을 한 소절씩 불러가며 고인의 정신을 기리던 기억이 생생해요."
동문들의 피땀 어린 노력에 회생한 대회는 싱어송라이터의 '산실' 역할을 해오고 있다. 2014년부터 CJ문화재단이 후원을 시작, 지난해부터는 동문회와 공동 주관사로 동문 앨범과 기념공연 제작·홍보, CJ아지트 공간의 스튜디오와 공연장 활용 등의 지원을 해오고 있다. 뮤지션 발굴의 폭을 넓히기 위해 만 18세 이상 대학(원)생이었던 지원 기준도 만 17세 이상으로 완화했다. 지난달 27일 마감된 올해 예선 접수에는 총 755팀 몰려, 역대 최고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올해로 30주년을 맞은 '유재하음악경연대회'의 동문회장 박경환. 그는 재주소년이란 명으로 국내 포크 음악씬에서 16년간 활동해왔다. 사진/뉴스토마토
"'유재하 경연대회'는 세상과 만나는 '창구'"
지난 2002년 대학교 1학년이었던 박 회장 역시 이 대회가 '주체적 음악가'로의 첫 걸음이었다. 제주도 자취방에서 녹음한 곡 '레이니 모닝(Rainy Morning)'을 들고, 무대에 섰던 날. 그 날의 기억은 지난 16년간 국내 포크씬에 '재주소년'이란 발자취를 새겨 온 그에게 아직도 선명하다.
"당시 사회를 보셨던 분이 박학기 선배였고, 저는 제주도에서 올라온 긴장한 새내기 대학생이었죠. 유경옥(유해인) 누나가 제 앞 순서였는데 너무 잘해서 긴장이 됐고, 무대가 너무 커서 앞이 캄캄했던 기억이 나요. 어설픈 노래와 기타실력이었지만 그때 그 경험은 지금 돌아봐도 저를 성장시킨, 좋은 기억인 것 같아요."
'유재하 경연대회'는 음악 지망생들이 세상과 만나는 '창구'로서 존재해왔다. 음원 시장에서 특정 장르의 음악 만이 살아 남는 지금도 대회는 소박하게나마 '자기 세계'를 이야기하는 싱어송라이터와 음악을 세상에 알려오고 있다.
"요즘 같은 음악 시장 구조는 음악 지망생들에게는 막연할 거예요. 자기 내면의 관찰이나 삶이 담긴, 보석 같은 곡을 쓰더라도 알려지기 쉽지 않은 환경이 됐으니까요. 가볍지 않은 노랫말에 잘 귀 기울여주지 않는 세상이지만, 우리 대회 만큼은 그런 노랫말에 귀 귀울이는 역할을 해야하지 않나 생각해요."
대회의 주된 평가 기준 역시 고 유재하의 생전 예술적 자의식을 따른다. '싱어송라이터로 주체적인 음악을 할 수 있느냐'다.
"곡 작업에 참여하지 않은 세션들을 데리고 무대에 오르는 건 지양합니다. 미리 녹음된 MR(플레이백 반주)을 틀어놓는 것도 허용하지 않고요. 개인이든, 팀이든 자신의 세계를 스스로 곡으로 만들고 연주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런 음악을 세상에 내놓은 ‘보석’ 같은 뮤지션을 찾는 게 우리의 일이죠."
지난 2014년 열린 유재하 음악 경연대회 시상식 모습. 사진/뉴시스
음악 동료들에 여전히 생생한 그 이름, 유재하
'재하는 김현식 선배한테 전화 받았던 이야기 같은 걸 했어. 기타 치면서 돈 맥클린의 '빈센트'를 흥얼거리기도 했지.' 고 유재하의 형 유건하는 동문회 뮤지션들과 만나면 고인의 생전 이야기를 종종 들려주는 편이다. 박 회장 역시 가장 최근에는 지난 4월 학전 콘서트 일환으로 진행된 '뉴포크 제너레이션' 무대 후 그와 만났다.
"평소에도 생전의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주세요. 그 날은 공연 뒷풀이에서 조그만 스피커로 '빈센트'를 함께 들으며 얘기했어요. 유재하 1집 LP 리마스터에도 실린 보너스 트랙이죠. 생전에 제가 실제로 뵙진 못했지만, 그런 선배들과 지인들 이야기를 듣다 보면 꼭 알고 지낸 음악 선배 같아요."
"재하는 늘 취해 있었지"라는 말 역시 포크 듀오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 등 선배들로부터 종종 듣던 말이다. "돌아가신지 벌써 꽤 시간이 흘러 아득히 느껴지는 선배이지만, 늘 이야기를 듣다보면 생생함으로 다가와요. '그런 정신이 있었지' 되새기다 보면 제 음악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요."
유재하란 타이틀과 음악 세계 때문에 조용하고 사색적인 음악만 조명되지 않냐는 일각의 편견에 대해서는 "장르에 선을 그으려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무조건 발라드나 피아노 치는 음악만 발굴하는 것은 아니에요. 지금까지 그런 뮤지션들이 많이 선정되다 보니 오해가 있을 거란 생각은 해요. 내면의 관찰이나 삶의 고민을 풀어낸 음악들 중에 좋은 음악이라면 굳이 사운드를 제한하려 하진 않아요. 김민기 선배도 '재하가 살아있었으면 전자음악을 하지 않았을까'를 늘 강조하시거든요."
올해로 30주년을 맞은 '유재하음악경연대회'의 동문회장 박경환. 그는 '레이니 모닝(Rainy Morning)'이란 곡으로 2002년 14회 대회에서 동상을 수상했다. 지난달 28일 합정 한 카페에서 지난해 동문회 뮤지션들과 제작한 앨범을 보고 있다 .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30주년' 모두가 함께 하는 축제로
올해 개최 30주년을 맞아 박 회장은 동문회 소속 뮤지션들과 뜻 깊은 '축제'를 기획 중이다. 유재하란 이름 석자와 관련된 대중음악계 인사들을 올해 11월 열릴 대회 기간에 초청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아직 결정된 건 없어서 조심스럽지만, 매년 대회 때 모시지 못했던 분들을 초청하려고 준비 중이에요. 유재하 선배 작고일을 본인 데뷔일로 정하셨다는 신승훈 선배, 유건하 형이 평소 감사해 하던 김형석, 박진영 같은 분들을 게스트로 모시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김민기 선배님은 늘 대부격으로 함께 해주시고 있고요."
이 대회 출신 뮤지션과 음악 제작자는 현재 한국 대중음악계를 움직이는 축이다.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프로듀서 방시혁 역시 1994년 이 대회 6회 동상 수상으로 가요계에 데뷔했다. 자신의 이야기, 자신의 노래를 방 한 켠에서 묵묵히 빚던 이들이 오늘날 한국 대중음악을 전 세계에 알리는 선봉에 서고 있다.
"선배들을 보면 큰 나무의 시원한 '그늘' 같다는 생각이에요. 유재하 경연대회 출신이라는 든든함도 있고요. 선배들이 먼저 뚜벅뚜벅 간 길을 따라 갈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고, 알게 모르게 위안이 되는 느낌도 있죠. 올해 지원하는 지망생들에게도 기댈 언덕이 되고, 이 대회 출신이라는 게 고향 같은 따뜻함으로 다가왔으면 해요. 이제는 이 대회의 선배들이 그들에게 큰 나무의 시원한 그늘이 되고 싶어요."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