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는 일본에게 여러 차례 침략을 당해왔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일본은 조선을 유린했다. 1875년에는 운양호 사건을 계기로 강화도조약을 강요한 후 침략의 강도를 높이더니 마침내 조선을 완전히 병탄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결과 함께 물러난 일본은 또다시 도발을 감행했다.
일본은 지난 7월4일자로 단행된 1차도발을 통해 한국의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에 들어가는 주요 소재의 수출을 막았다. 지난 2일 발표된 2차 도발은 무려 857개 품목이 대상이다. 무력은 동원하지 않은 대신 경제적으로 한국을 옥죄자는 것이니, 말하자면 '경제왜란'이다.
일본은 우선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노동자에 대한 대법원 판결의 사실상 무효화를 노리는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서 한국의 경제기반을 송두리째 허물어 궁핍화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넋놓고 있다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로 이어지는 일제 침략을 당했을 때도 조선의 국정은 피폐하고 지배세력은 부패하고 분열됐다. 일본은 그런 틈을 타서 압박을 강화하더니 마침내 나라 전체를 통째로 삼켜버렸다.
그렇지만 지금은 다르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고, 역동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발돋움했다. 한국의 민주주의와 시민의 활기는 일본을 넘어섰고, 경제력도 착실하게 추격해 가고 있다. 그러니 이제 한국의 숨통을 죄어야겠다고 일본은 판단했을 가능성도 있다.
아울러 일본은 과거 한반도에서 저질렀던 악행에 대한 기억을 떨쳐내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죄업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응분의 배상을 할 참된 용기가 없는 것이다. 대신 사소한 꼬투리를 빌미로 소란을 일으키고 본질을 덮어버리는 저열한 술수만 가득하다.
그럼에도 지금처럼 격한 대립은 분명히 바람직하지 않다. 때문에 필자는 외교적 해결의 필요성을 강조해 왔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에 특사를 파견하는 야당의 방안이나 제3국에 조정을 맡기는 일본의 방안도 고려해볼 만하다고 여겨 왔다. 그러나 일본의 태도를 볼 때 사태가 그렇게 단순한 것 같지는 않다. 이를테면 한국이 특사를 보낸다고 해서 문제가 깨끗이 해결될지는 의문이다.
사실 당장 한국의 선택지는 많지 않아 보인다. 우선은 정확하고 효과적인 정책으로 '경제왜란'에 대응하고 피해를 줄여야 한다. 동시에 중장기적으로 일본에 대한 부품소재 의존을 줄여나가는 것이 최선의 방책일 것이다.
한국정부는 '경제왜란'에 대응하기 위한 대책을 연일 쏟아내고 있다. 2일 국회를 통과한 추경예산에 소재부품 국산화 지원 예산 2732억원이 들어갔다. 내년 예산에도 1조원 이상을 반영한다는 것이 정부 계획이다. 5일에는 100대 핵심품목의 국내 공급안정화 방안이 제시됐다.
그렇지만 당장 직면한 '불확실성'이 문제이다. 이번 경제왜란의 파장이 언제까지 어떻게 미칠 지 알 수 없다. 일본이 날려보낸 보복의 악령이 실물경제뿐만 아니라 금융까지 덮칠 수도 있다. 국제신용평가기관 무디스는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인해 한국의 신인도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마디로 한국 경제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으로 진입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일본이 2차보복을 감행한 2일에 이어 5일에도 코스피와 코스닥 주가는 큰 폭으로 떨어졌다. 원화가치도 떨어져서 원·달러 환율이 1200원선을 훌쩍 넘어섰다. 2017년 북한이 핵도발이 자행할 때보다 더 민감하게 움직인다. 아마도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가장 어려운 시기가 아닌가 한다. 이럴 때 정부나 금융사 혹은 기업들이 조금이라도 잘못 대응하면 시장은 큰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한국경제로서는 안팎의 도전과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중대한 갈림길에 와 있다. 불확실성의 안개가 자욱한 갈림길이다. 문재인정부의 운명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잘만 대응하면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자칫하면 테세우스의 아들 히폴리토스처럼 추락할지도 모른다.
미래의 선은 필요하고 기대되지만, 그것이 당면한 악과 고통을 언제나 합리화하고 해소해주는 것은 아니다. 당장의 악과 고통이 지나치면 미래의 선을 아예 포기할 수도 있다. 산업의 부품소재를 일본에 의존하지 않는 상황은 분명이 미래의 '선'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지금의 불확실성을 한없이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정부는 지금 불확실성의 안개를 걷어내는 데도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차기태 언론인(folium@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