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정부는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일본 수출규제 대응 관계장관회의를 거쳐 제시된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 대책’을 내놓았다. 대책에 따르면 반도체 산업 등의 분야에서 연구개발과 생산시설 확충을 위한 환경과 입지 관련 절차가 대폭 단축된다. 이른바 ‘패스트트랙(Fast-Track)’ 제도를 활용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로 수급사정이 어려워진 대응 물질의 경우 화학물질 취급 시설 인·허가 및 기존 사업장의 영업 허가 변경에 소요되는 기간이 75일에서 30일로 줄어든다.
일본의 경제보복 표적이 된 반도체의 경우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상 별도의 시설 관리 기준을 적용해준다. 서류제출 부담도 가벼워진다. 쉽게 말해 불산 등 반도체용 화학물질을 생산하는 공장은 환경규제가 대폭 완화되는 것이다. 공기업인 한국가스공사도 반도체 가스와 관련된 사업장의 유해화학물질 설치를 위한 검사 기간을 30일에서 5일로 대폭 줄이기로 했다.
주 52시간 근로제도 ‘칼질’을 당하게 됐다. 뉴스1통신 보도에 따르면 최근 한 중소기업이 근무시간을 주당 52시간으로 늘리겠다며 신청한 특별연장근로 확대 조치가 정부의 인가를 받았다. 그것도 신청한 다음날 곧바로 인가했다. 법원의 인신구속 영장 발부속도보다 빠르다.
나아가 더불어민주당은 주 52시간제를 크게 흔드는 법안을 지난 11일 제출했다. 원내수석부대표라는 직함을 가진 이원욱 의원이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접수했다. 주52시간 근로제의 '속도조절'을 위한 법안이다. 사업장을 규모별로 나누고 제도의 도입 시기도 늦추자는 것이다. 이 법안이 그대로 통과되면 내년부터 주 52시간 근로제도를 도입해야 하는 기업이 '50인 이상 300명 미만' 사업장에서 '200인 이상 300인 미만' 사업장으로 바뀐다. 시행시기도 내년에서 2021년으로 늦어진다. 문재인 정부가 주52시간 근로제를 서둘러 도입할 때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이기는 하다. 결국 이제 와서 스스로를 부정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화학물질 규제완화와 주52시간 근로제 수정의 명분이야 이미 충분히 확보돼 있다. 일본에 매달리던 소재·부품·장비 산업을 조속히 ‘독립’시키자는 것이다. 여기에는 기업의 적극적인 협력이 필수적이다.
특히 대기업이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어렵다는 것을 정부는 알아차렸다. 이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고위당국자들이 재벌들과 잇따라 접촉하고 있다. 재벌기업을 대하는 정부의 자세는 요즘 사뭇 달라진 듯하다. 문재인정부가 추진해오던 ‘재벌개혁’도 허물어질 조짐을 보인다. 이를테면 대기업이 계열사에서 핵심 소재와 부품을 조달하면 ‘일감 몰아주기’ 규제의 예외를 인정할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의 경제보복 화살 앞에서 방패가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정부의 자세변화는 어느 정도 불가피해 보인다. 그렇지만 그 불가피성이라는 방패의 그늘 아래 재벌의 사익편취라는 독버섯이 더 커질 수도 있기에 걱정된다. 먼 옛날 스파르타 병사들도 ‘방패그늘’로 페르시아 대군의 화살을 막아보려 했다. 그렇지만 지금의 ‘방패그늘’은 스파르타인들의 그것과는 달라 보인다. 어쩌면 신종 ‘밀월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아닐까?
이제 ‘경제민주화’의 입지도 좁아지고 있다. 단순히 일감몰아주기 규제 완화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개혁조치들도 사실상 동력을 잃을 가능성이 커졌다, 이미 국회에 제출된 공정거래법이나 상법개정안 등의 재벌개혁 법안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현재 한국 경제의 척수는 분명 재벌이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문재인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밝힌 ‘경제강국’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재벌의 힘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지금 국내외적으로 경제여건이 몹시 어둡다. 특히 ‘경제왜란’으로 인한 악영향을 방어하려면 재벌의 역할이 작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여당인 더불어민주당도 올해 정기국회에서 ‘경제민주화법’ 대신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등 ‘경제활력법’ 통과에 집중하기로 했다고 어느 경제신문이 보도했다.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들 경제민주화 법안은 결국 어떻게 될까? 아무래도 이번 20대 국회에서는 테바이에서 쫓겨난 오이디푸스와 같은 운명을 겪을 것 같다. 그런 운명을 맞지 않으려면 정부여당이 큰 용기를 내야 한다. 그렇지만 주변 경제여건이 현실과의 ‘타협’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니 어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을까?
그렇다면 21대 국회에서는 되살아날 수 있을까?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21대 국회에서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영원히 실종될지도 모르겠다.
차기태 언론인(folium@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