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과거사 정리 - 시간과 공간이 다른 두 개의 세계

입력 : 2019-09-10 오전 6:00:00
한일관계 배후에는 과거사 문제가 있다. 평화로워 보이던 한일관계가 갑자기 악화되는 바닥에는 깊은 감정의 골이 있다. 깊은 감정의 골은 일제 강점기 주권침해와 인권침해 사건을 정리하지 못한 결과이다. 과거사 정리를 하지 못한 것은 한국도, 일본도 같다. 한국은 해방된 지 75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다고 자책한다. 일본은 패망한지 7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욱일기를 사용하고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를 한다. 국내적으로 과거사 정리가 되지 않았으니 한일 공동의 과거사 정리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두 나라의 시민들도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만은 공통의 인식이 없다.  
 
과거사 정리는 여러 특징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시간과 공간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피해자는 피해를 당한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자신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그 날은 잊혀지지 않는다. 피해자의 생생한 기억은 피해를 겪지 않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전달된다. 일본 사람을 만난 적도 없는 한국 사람이 일본에 적대감을 갖는 이유는 피해자에게 공감하기 때문이다. 언제 다시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함께 공유한다. 
 
하지만 가해국가 시민들은 다른 시간과 공간을 살고 있다. 일반시민들은 피해자들에게도 가해자들에게도 제대로 공감할 수 없다. 실제 가해자는 모두 죽었다. 가해 당시의 국가는 청산되었다. 일본만 하더라도 군인이 지배하던 군국주의 체제는 청산되었다. 이들은 현재의 일본에서 태어나 살고 있다. 피해자, 피해국가의 시민들과 완전히 다른 시대, 다른 공동체에 살고 있다. 그래서 감정적으로 피해자들을 이해하기 어렵다. 
 
사람의 정체성은 개인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정체성의 대부분은 공동체가 제공한다. 한국 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 성향,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은 개인이 만든 것이 아니다. 공동체의 공동 경험으로 탄생한 것이다. 민족주의에 근거한 국가 건설 과정, 1명의 대통령을 하야시키고 4명의 대통령을 교도소로 보낸 민주화 투쟁의 경험은 한국 시민들을 강한 민족주의자, 투철한 민주주의자로 만들었다. 이런 경험이 없는 다른 나라 시민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정체성이다. 
 
한일의 공동 과거사 정리가 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공동체의 경험 차이, 시민들의 정체성 차이 때문이다. 이 간격은 뛰어넘기 어렵다. 아무리 사과를 요구하고 또 사과를 해도 감정적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는 없다. 이것은 인정하고 시작해야 한다.
 
공동체의 경험 차이, 정체성의 차이는 과거사 정리의 한계를 설정한다. 같은 공동체 안에서도, 같은 정체성을 가진 시민들 사이에도 정의를 실현하고 인권을 보장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다른 시간과 공간을 사는 공동체 사이의 정의 실현은 더욱 어렵다. 피해자의 사과와 처벌을 강조하고 감정을 자극하는 과거지향적 정의는 시간이 흐르면서 어렵게 되었다. 일본의 패망 직후 열렸던 도쿄전범재판으로 사실상 과거지향적 정의는 끝났다. 
 
필요한 것은 미래지향적 정의다. 미래지향적 정의는 과거의 개인에 대한 공격을 공동체에 대한 중대한 침해로 인정하는데서 시작한다. 피해자의 명예와 인권을 회복시키고 다시 출발하도록 충분한 지원을 한다. 그리고 과거 참혹한 인권침해를 공동체의 이름으로 기억하고 다시는 인권침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한다. 피해자 중심의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가해자 사과와 용서는 그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가해자의 진심어린 사과가 있으면 좋겠지만 사과가 없다고 과거사 정리가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가해자의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가해자 중심의 정의다.
 
미래지향적 정의 실현과정은 필연적으로 공백을 낳는다. 정의 실현 요구와 실제 피해회복의 공백이 그것이다. 이 공백은 시간과 여유로 풀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과거사 정리에는 공백이 발생한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공백을 인정할 때 한국과 일본은 서로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이 명백해지고 같이 미래지향적 정의를 지향할 수 있다. 이웃국가로서 같이 미래지향적 정의에 기반하여 평화와 인권이 정착시킬 수 있다.  
 
김인회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변호사
 
 
 
김인회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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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