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러시아 재발견 13화)바이칼 남단 슬류쟌카에 내리는 비

입력 : 2019-12-16 오전 8:00:00
어느 크리스마스 날 저녁, 낫과 망치와 별이 그려진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의 삼색 국기가 올라갔다. 지난 세기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경험했지만 그 세기가 저물 무렵 이 첫 실험의 실패도 목격해야 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사라지고 새로운 러시아가 역사에 등장했을 때, 타국의 사람들은 충격과 호기심으로 이 세계사적 사건을 지켜보았고 러시아인들은 혼돈과 기대, 희망과 절망의 시간 속에 던져져 있었다. 강산이 두세 번 바뀔 동안 커다란 변화를 겪어온 러시아인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다른 시대, 다른 유학생
 
슬류쟌카에 내리기 약 2시간 전이다. 차창 밖으로 바이칼의 넓은 물이 넘실대고, 곡선을 그리며 달리는 기차의 앞머리가 계속 커브로 보인다. 하림, 시현 씨와 비슷한 또래라서 내내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베트남 여학생 판 티 호아 씨가 나의 아래층 이웃 류다 씨, 새로 탑승한 러시아 아저씨와 함께 한참 생선 이야기에 몰두해 있다.
 
만 21세인 호아 씨는 베트남의 다낭 출신으로, 그곳 대학의 관광학과를 1년간 다니다가 하바롭스크의 태평양 국립대로 유학을 와 러시아어를 배운지 1년이 되었다. 베트남에서 자기 전공을 마치고 싶었다던 그녀가 어떻게 유학을 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말에 따르면, 러시아도 하바롭스크도 자신이 선택한 곳은 아니었고 국가가 정해준 대로 온 것이라 한다. 러시아 생활과 학업의 고충을 토로하던 그녀가 밝힌 소망은 졸업 후 귀국해서 결혼하는 것이다.
 
모스크바 국립대 본관 기숙사의 측면 출입문(오른쪽), '베(V)' '데' '줴' 동 입구라 쓰여 있다. 학생들은 중앙 출입문보다 측면 출입문을 자주 사용하는 편이다. 사진/필자 제공
 
호아는 내가 1990년대에 기숙사에서 만났던 베트남 유학생을 떠올리게 했다. 그는 로모노소프 모스크바 국립대 대학원 기숙사에서 아내와 어린 자녀들과 함께 살았는데, 나를 비롯한 한국 유학생들이 그를 정기적으로 방문한 이유는 그가 학생이자 일종의 ‘암달러상’이었기 때문이다. 기숙사의 우리들은 한국에서 가져 온 달러를 루블로 환전할 때 편하게 그리고 조금 좋은 환율로 바꾸기 위해 그의 방을 찾곤 했다. 그와 그의 아내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맞고 아이들이 수줍게 인사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베트남 공산당이 ‘도이머이’(쇄신) 정책을 결의한 게 1986년 제6차 전국대표대회에서였으니, 내가 그를 보았던 90년대는 베트남이 사회주의 기반의 시장경제 건설을 목표로 왕성하게 개혁을 추진하던 때였다. 그가 어떤 경로로 달러환전상 부업을 하게 됐는지, 학업을 마치고 귀국 후 잘 정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부업이 좁은 방 두 개로 이뤄진 기숙사의 한 블록에서 자녀들과 함께 생활하던 유학생 가정의 살림에 제법 도움은 되었을 것이다. 1990년대의 그도, 2019년의 호아 씨도, 베트남 정부의 지원을 받았고 지원 받는 것이겠지만, 사는 게 팍팍해 보였던 유학생 가장과는 달리, 자비로 자유롭게 여행 중인 호아 씨를 보니 새삼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슬류쟌카의 비
 
이 횡단열차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첼랴빈스크까지 가는 남우랄 노선으로, 몽골과 인접한 부랴트 공화국의 수도 울란우데를 지나간다. 슬류쟌카 전 역인 울란우데에서 탄 옆 칸 승객들이 왁자지껄 즐겁게 웃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러시아인들과 부랴트인으로 구성된 이 일행은 음악가들과 의사라고 하는데, 우랄 산악지대로 휴가 겸 거리 연주를 떠난다는 이야기를 듣다가 하마터면 슬류쟌카에 못 내릴 뻔 했다. 모두와 허겁지겁 인사를 나누고 내리는 나의 뒤에서, 그동안 무심한 듯 정감 있었던 승무원이(아…그녀의 이름을 묻는 걸 잊었다) 비를 맞는 내 우비 깃을 바로 잡아준다.
 
슬류쟌카 기차역은 이 지역에서 나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건물이다. 사진/필자 제공
 
슬류잔카는 이르쿠츠크 주(오블라스찌) 남쪽의 작은 도시로, 바이칼 호수 서남단에 자리 잡고 있다. 이르쿠츠크 시에서 교외선으로 약 3시간 정도 거리이다. 슬류쟌카에 머무는 동안 내내 비가 내렸다. 이후 바이칼 일정 동안 계속된 나쁜 날씨의 전조가 된 셈이다. 슬류쟌카에 내리는 비는 ‘마을’로 보이는 이 작은 도시를 감싼 듯한 우울한 분위기와 잘 어울려 보인다. 마을의 집들은 동화 속처럼 형형색색 다양하게 예쁘고 길바닥에는 대리석 조각들이 누워 있는데, 또 그 집들 뒤에는 운모, 금운모, 청금석 같은 각종 광물을 품은 산이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데, 이 고즈넉함 속에 깃든 우울한 습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러시아의 옛집들이나 이르쿠츠크의 집들에서도 보이지만, 슬류쟌카의 집들은 다양하고 예쁜 창문들이 특색이다. 사진/필자 제공
 
사실, 2019년 6월 말 뚤룬 시를 비롯해 이르쿠츠크 주 곳곳에서 대대적인 홍수가 발생해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낳았다. 내가 슬류쟌카를 방문했던 당시인 7월 말 이르쿠츠크 지역 강들의 수위가 다시 상승되기 시작해 여러 마을에 대피령이 떨어졌다. 뚤룬 주민 1만 명 이상이 물을 마실 수 없어서 타 지역으로 소개(疏開)되었다. 대피령은 내려지지 않았지만 슬류쟌카도 홍수 지역에 포함되었고, 내가 숙소를 떠난 직후 온 마을이 정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러시아의 국영 텔레비전 채널 ‘뻬르븨 까날’(제1채널)의 11월 11일자 보도에 따르면, 여름에 대홍수를 겪은 뚤룬 주민들이 영하 20도(11월 당시 기준)의 날씨가 왔는데도―게다가 연방 예산에서 자금이 제 시간에 도착했는데도―지붕 없이 지내고 있다는 소식이다. 러시아 언론은 12월 12일 이르쿠츠크 주지사 레프첸코가 뚤룬과 여러 마을에서 발생한 대규모 홍수로 인해 ‘자유 의지’로 사직서를 제출했고 푸틴 대통령이 그것에 서명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슬류쟌카에 스며있는 침체감은 홍수보다 오래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홍수로 이어진 슬류쟌카의 비. 사진/필자 제공
 
호스텔 풍경
 
빗길을 철벅이며 숙소인 호스텔에 들어섰다. 식탁이 몇 개 놓인 어두운 식당 공간에 주인이 홀로 앉아 있다. 그녀는 혼자라서 그런지 더 널찍하게 보이는 식당 한편에 놓인 텔레비전을 우두커니 보고 있다. 70년대 소련 시절의 영화다. TV 화면만 컬러고 주위가 흑백으로 느껴진다. ‘숙소 주인 따냐 씨는 우울하다...’ 나는 내 멋대로의 첫인상을 되뇌어 본다. 그러나 비는 오고 침침한 실내에서 그녀와 단둘이 대화를 주고받는 이 공간이 마치 어느 연극무대에 등장하는,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의 여인숙을 상기시킨다.
 
저녁 뉴스가 시작되자 홍수 소식 외에 남북한 소식이 나오고 ‘유엔군 참전의 날’ 기념식에서 연설하는 이낙연 총리의 모습이 나온다! 1992년 2월 처음 러시아에 왔을 때 놀란 것 중의 하나가 러시아 텔레비전에서 한국 관련 뉴스를 상대적으로 자주 내보낸다는 것이었다. 그 전에 경험했던 미국에 비해 그러했고, 그 이후 경험했던 프랑스에 비해서도 그러했다(프랑스에서 받은 개인적인 인상은 그들이 남북한에 관심도 없지만 굳이 비교한다면 남한보다는 북한 관련 보도에 더 흥미를 보인다는 점이다). 덕분에 따냐 씨와 대화가 시작됐다.
 
‘유엔군 참전의 날’ 기념식에서 연설하는 이낙연 총리의 모습이 러시아 텔레비전 저녁 뉴스에 나오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그녀는 54세, 이르쿠츠크에서 법대에 다니는 아들이 방학이라 집에 와 어머니를 돕고 있다. 기차역과 호스텔 사이를 오가며 손님들을 실어 나르는 용돈 벌이다. 알고 보니 이 호스텔은 두 채로 되어 있어 옆 동에 기차역에서 봤던 유럽인 그룹이 묵고 있다 한다. 역시 유럽 젊은이들은 주로 싼 숙소를 활용한다. 내가 머무는 동은 따냐 씨의 가정집이다. 그 안의 한 방을 다인실로 만들어 놓았는데, 근처에 사는 그녀의 외손자도 와 있어 소년의 말소리가 옆방에서 들린다.
 
숙소인 슬류쟌카의 호스텔 식당은 고요하고 썰렁한 느낌을 자아낸다. 사진/필자 제공
 
“이곳엔 일거리가 없어요. 2000년경부터 마을의 경제 사정이 악화됐어요.” 따냐 씨에 의하면, 거의 20년 전부터 국영공장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고 자연히 일자리도 없어졌다는 것이다. 사기업으로 전환된 곳들도 세금 부과 때문인지 차츰 폐쇄됐다고 한다. 슬류쟌카는 운모를 채취하고 가공하는 공장들이 번성했던 곳이다. 발음은 ‘슬류쟌카’, 철자는 ‘슬류댠카’인 이곳의 지명도 ‘슬류다’(운모, 雲母)에서 나온 것이다.
 
“이제 슬류쟌카에는 철도 노동자만 남았어요. 철도 정비사나 그들의 조수들은 약 8만~9만 루블 정도의 월급을 받지요.” 나는 속으로 ‘곱하기 20 빼기 약간’이라는 환율을 적용해 그것을 원화로 계산해 보았다. 기차에서 만난 류다 씨가 초등학교 1학년 담임 시절에 받았다는 1만5000루블보다 훨씬 많다. 갓 초등학교 교사가 된 젊은이의 초봉은 약 1만8000루블로 3년간 보충 금액이 지불되는데, 이는 젊은이들을 학교에 붙잡기 위해서라고 한다.
 
철도 정비사의 월급이 초등학교 교사 월급보다는 훨씬 많지만, 높아진 물가와 집세를 생각한다면 따냐 씨의 말대로 많다고 할 수도 없는 셈이다. 슬류쟌카의 인구는 1만8000~1만9000 사이로 2만 명이 채 못 된다. “마을 주민들은 병원이나, 상점, 학교 외에는 일이 없어요. 철도 정비사가 제일이에요.” 나는 따냐 씨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슬류잔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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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익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