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서윤 기자] #. 현대중공업 하도급업체 백산산업은 2015년 10월15일 선박 취부·용접 작업 견적서를 당일까지 제출해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의뢰서 상 공사기간은 당일부터 그해 10월23일까지였지만 허위였다. 백산산업 작업일지에는 그보다 일주일 전인 10월8일부터 해당 작업을 하고 있던 사실이 확인됐다.
#. 경부산업은 2012년 6월21일 전장 전선설치 등 13건의 작업 의뢰서를 받았다. 견적서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견적서 작성을 ‘의뢰(지시)’하는 이메일 첨부파일에는 견적서 전산에 입력할 계약금액이 기입돼 있었고, 1원 하나라도 다른 값은 아예 입력되지 않도록 설정돼 있었다.
작업을 먼저 시작하고 계약서를 발급하는 ‘선시공 후계약’ 방식은 ‘하도급대금 후려치기’로 이어졌다. 백산산업은 작업에 우선 투입한 비용 195억원 중 64% 가량인 124억원밖에 돌려받지 못했다. 하도급업체의 제조원가는 사실상 모두 인건비다. 경부산업 대표도 작업비 176억원을 쓰고 절반이 조금 넘는 104억원만 받았다. 경부산업 대표는 개인 재산을 처분하고 사채 빚까지 졌다. 그래도 끝내 밀린 임금과 퇴직금, 4대보험료 중 6억원을 내지 못했다.
백산산업이 2015년 10월15일 현대중공업으로부터 받은 작업 의뢰서(위)와 그로부터 일주일 전인 10월8일 작성된 작업 내용 기입 문서. 자료/현대중공업 하도급갑질 피해하청업체 대책위
18일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현대중공업(현 한국조선해양 포함)은 2014년부터 2018년까지 207개 사내하도급업체에게 4만8529건의 선박·해양플랜트 제조 ‘본 공사’ 작업을 위탁하면서 계약서를 사후 발급했다. 작업 시작 후 대개 하루에서 열흘 이상 계약서 발급을 지연했는데, 최대 416일까지 걸린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하도급업체는 구체적인 작업과 대금을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우선 작업을 진행한 후 원청이 사후에 일방적으로 정한 대금을 받아들여야 하는 불리한 지위에 놓였다는 게 공정위의 판단이다.
선주 요청이나 변형 등의 사유로 발생하는 ‘추가공사’는 더욱 대금을 결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의뢰했다. 현장에서 직접 지시가 이뤄진 뒤, 원청 생산부서가 실제 작업에 소요되는 ‘공수(Man-Hour·작업 물량을 노동 시간 단위로 변환한 것)’를 바탕으로 추가공수를 산정해 예산부서에 예산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예산부서는 늘 합리적·객관적인 근거 없이 생산부서가 요청한 공수를 삭감했다. 이 과정에서 작업을 직접 수행하고 대금을 지급받을 하도급업체와의 협의절차는 누락 됐다.
공정위는 “공수계약의 하도급대금은 공수와 ‘계약단가’를 곱해 결정되는데, 계약단가는 계약 기간 동안 고정된 값이다 보니 원청이 공수를 임의로 적게 인정하는 방법을 통해 대금을 삭감한 것”이라고 봤다.
또 “사내하도급업체들은 사무실·장비·기자재 등 작업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원청에서 지급받고 오로지 인력만을 공급하는 형태의 업체들”이라며 “원청이 업체들의 제조원가 대부분이 인건비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감안하고, 업체들의 인건비 구조와 고용노동부 실태 조사 자료 등을 바탕으로 최소한의 ‘1공수 당 원가’ 기준을 판단했다”고 분석했다.
하도급대금 삭감이 오롯이 업체 소속 노동자들의 임금 삭감 피해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원청이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공정위는 2016년부터 2018년까지 발생한 추가공사 작업 중 1785건이 이런 식으로 이뤄져 작업 진행 이후 결정된 대금이 제조원가보다 낮은 수준으로 책정된 사실을 확인했다.
현대중공업 직원이 하도급업체 대표들에게 보낸 인원 동원 요청 및 작업 지시 문자에는 '선시공 후계약' 관행이 그대로 담겼다. 자료/현대중공업 하도급갑질 피해하청업체 대책위
아울러 현대중공업은 2015년 12월 선박엔진 관련 부품을 납품하는 사외 하도급업체들을 대상으로 간담회를 열어 2016년 상반기에 일률적으로 10% 단가 인하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단가 인하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 ‘강제적 구조조정’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압박했다.
간담회 이후 이뤄진 단가 계약 갱신 과정에서 하도급업체들의 단가는 일률적으로 10% 인하됐고, 2016년 상반기 9만여 건의 발주 내역에서 48개 하도급업체를 대상으로 51억원의 하도급대금이 인하된 사실이 공정위에 의해 확인됐다. 공정위는 “48개 하도급업체는 밸브, 파이프, 엔진블록, 판넬 등 납품하는 품목이 상이하고 원자재, 거래 규모, 경영상황 등도 각각 다르다”며 “일률적인 비율로 단가를 인하할 만한 정당한 사유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공정위는 현대중공업의 △사전 서면발급의무 위반과 △부당한 하도급대금 결정 혐의를 위법행위로 인정하고, 지난 6월 중간지주사가 된 한국조선해양에 대해 ‘시정명령(재발방지·공표명령)’과 함께 ‘검찰 고발’ 조치했다고 밝혔다. 사업부문인 현대중공업에도 ‘과징금 208억원’을 부과키로 했다.
또한 현대중공업은 지난해 공정위가 조사에 착수하자 조사대상 부서의 273개 저장장치(HDD) 및 101대 컴퓨터(PC)를 교체하고, 관련 중요 자료를 사내망 공유폴더와 외부저장장치(외장HDD)에 은닉한 혐의도 받는다. 공정위는 “현장조사 과정에서 이를 확인하고, 이런 행위에 조사를 방해할 목적이 있었다는 증거를 확보했다”며 △공정위 조사방해 행위에 대해서는 한국조선해양 법인에 ‘과태료 1억원’을, 소속직원 2명에게 ‘과태료 2500만원’을 각 부과했다.
이날 공정위의 결정에 대해 한국조선해양 및 현대중공업 측은 불복 의사를 밝혔다. 회사 관계자는 “공정위의 입장을 존중하나, 조선업의 특수성과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점이 있어 아쉬움이 있다”며 “일부 사항에 대해서는 입장 차이가 있어 필요한 법적 절차를 준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또 “아울러 그간 해온 제도개선 노력에 더하여 협력회사와 상생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추진하고 앞으로도 지속 발전시킬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대중공업 하도급갑질 피해하청업체 대책위원회는 “공정위에서는 피해업체와 논의해 합의서를 제출하면 벌점을 경감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으니 대책위와 함께 피해 구제에 노력해야 할 것”이라며 “이와 같은 구제 행동을 하지 않을 경우 대책위는 개별계약서에 성명이 등재된 현대중공업 직원과 임원들 모두를 형사 고발할 것”이라고 별렀다.
현대중공업은 18일 공정위의 조치에 대해 법적 대응 의사를 밝혔다. 사진은 울산본사 전경. 사진/뉴시스
최서윤 기자 sabiduria@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