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밴드신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 차트를 가득 메우는 음악 포화에 그들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죽어버린 밴드의 시대’라는 한 록 밴드 보컬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싱어송라이터 오소영. 사진/애프터눈레코드
어쿠스틱 기타의 아르페지오만으로 짙은 새벽 향이 깔린다. 여기에 겹쳐지는 고우면서도 허스키한 목소리, 불길하고 위태로운 노랫말.
2001년, 음악은 마냥 밝지만은 않은 삶의 조탁이었다. 부드럽지만 뾰족했고 아름답되 잔인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세계를 맞닥뜨려 선율로 빚었다. 기타로 꿈을 튕기고 때론 날카로운 삶의 모서리에 부딪치며.
어언 2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는 깨달아가고 있다. 강가의 돌멩이처럼 자신을 조금 깎고 도려내면 된다는 것을. 어쩌면 이 불가해한 세계를 품고 안을 수 있다는 것을.
싱어송라이터 오소영. 사진/애프터눈레코드
음악과 삶을 둥글둥글 여기게 된 것은 돌아보면 ‘그들’ 영향일지 몰랐다. 음악 ‘장인들’의 음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 농도가 짙어지고 있다.
21일 서울 마포구 연남동 한 건물 3층에 위치한 ‘애프터눈레코드’ 스튜디오. 어깨까지 오는 밝은 색 머리의 싱어송라이터 오소영(47)이 인터뷰 도중 “들려줄게 있다”며 스피커 볼륨을 천천히 올리기 시작했다.
‘좋은 노래, 좋은 소리란 좋은 마음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마음이란 마치 꽃의 향기같아 넓게 넓게 퍼져가는 것이죠. 그런 좋은 분위기를 위해선 늘 서로에게 열중하고 세심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 ‘노래하는 이들에겐 그런 분위기들이 전통으로 남겨질 것이고 저희 노래에 귀 기울이는 이들이 그런 분위기를 나누고자 할 때는 아마 그보다 더 한 축복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한국대중음악사를 빛낸 음유시인들의 공동체 ‘하나음악(이후 2000년대 푸른곰팡이, 현재 최소우주가 그 명맥 계승을 표방)’ 수장. 고 조동진(1947~2017) 선생의 생전 음성. 컴퓨터 깊숙이 저장해 둔 부드러운 중저음 목소리는 들을 때마다 그의 가슴을 뜨겁게 데운다. 반복 재생하기를 수차례. 고인의 음악적 숨결과 태도는 늘 바람처럼 불어 와 마음에 겹겹의 인장을 아로 새긴다.
오소영 1집. 사진/애프터눈레코드
오소영이 하나음악과 연을 맺은 건 20대 중반 데모 CD를 보내면서다. 1994년 ‘가을에는’으로 ‘제 6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입상한지 4년 만의 일. 거짓말처럼 고 조동진이 수장으로 있던 하나음악 측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부산에서 기타만 멘 채 갓 상경한 그에게 조동진과 그의 동생 조동익은 각별했다. 특히 조동익은 이후 3~4년 간 곡의 원형성, 그러니까 오소영의 목소리와 기타연주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1집 데모CD의 편곡 전반을 맡았다. 주요 드럼 리듬을 직접 악보에 그려오거나 다른 소리들을 쌓아올리고, 녹음 악기를 골라줬다. 프로듀서는 조동진이었다. 하늘을 나는 새의 눈으로 앨범 전반을 조감하며 코칭했다. 그렇게 2001년 ‘기억상실’이란 이름의 데뷔 앨범이 세상에 나왔다.
“제 목소리와 기타가 주연이었다면 그 외적인 사운드들을 조연처럼 더해 주셨어요. 지금 다시 들어보면 느껴요. 그게 얼마나 대단하고 굉장한 것이었는지...”
오소영. 사진/애프터눈레코드
당시 앨범은 부드러운 목소리, 영롱한 기타 튕김이 날카로운 노랫말과 아찔한 줄다리기를 한다. 누구에게나 꿈을 쫓는 일상은 아름답지만 아득해 무겁기 마련이다. 꿈과 현실의 경계, 불길하고 위태로운 단상들. 작중 화자는 결국 바람에 실려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 한다.
악기와 목소리만으로 자극적이지 않지만 그래서 오래도록 찾게 되는 아름다운 음악. 바람결에 실려 배회하고 방랑하는 생의 선율. 장필순과 하덕규(시인과 촌장), 고찬용(낯선 사람들)…. 하나음악 선배들이 이어온 음유시적인 향기는 이때부터 그의 음악에도 아른거렸다.
이후 잇따라 긴 호흡으로 음악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2집 ‘a tempo’가 나온 건 데뷔작으로부터 8년 뒤인 2009년이다. 왜 그렇게 오래 걸린 걸까. 1집의 질문이 생활에서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다른 일들을 병행하다보니 기타를 잡기 쉽지 않았다. 음악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역설적으로 해결책은 음악이었다. 현실의 불안과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그 곳에 있었다. 여행은 늘 현실의 벽에 가로 막혔지만 그는 음악으로 여행했다. 멜로디와 화음으로 그려내는 바다와 하늘, 오솔길, 새 한 마리…. 광막하고 황홀한 상상에 기초한 소리 풍경이 역설적으로 내면의 자정, 정화 역할을 했다.
21일 서울 마포구 연남동 한 건물 3층에 위치한 ‘애프터눈레코드’ 스튜디오에서 만난 싱어송라이터 오소영.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다시 11년 만이다. 24일 3집 ‘어디로 가나요’가 세상 빛을 보기까지 이 뮤지션은 또 긴 숨 한 번을 들이켰다.
뒤돌아보면 다른 사람이나 세상을 탓할 것이 없었다. 되려 스스로를 돌아보고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20대 때보다 타인의 의견을 수용하는 유연성도 많이 생겼다. “경험 때문인가, 나이 때문인가,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거목 같은 선배님들이 제 곁에 계셨기 때문만은 분명해요.”
고 조동진 선생은 늘 아버지 같은 모습으로 그의 곁에 있다. 지금도 그가 긴 숨을 내쉴 때 그 중저음의 부드러운 음성이 다가온다.
‘잘 할 거니까, 걱정 말고 그냥 해라.’
오소영 3집 ‘어디로 가나요’. 사진/애프터눈레코드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