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밴드신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 차트를 가득 메우는 음악 포화에 그들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죽어버린 밴드의 시대’라는 한 록 밴드 보컬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 ‘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서울 마포구 연남동 인근 한 건물의 지하 1층. 현관문을 열자 초현실적 공간이 눈 앞에 펼쳐졌다. 최근 미국 공영방송 NPR 전파를 탄 그 곳. 그러니까 ‘왼쪽 위 노란색 커피믹스가 있고 노래는 퓨전 국악이고 티셔츠는 너바나’라며 유튜브를 뜨겁게 달군, 그 ‘제 5세계’ 쯤 되는 장소 말이다.
올해 데뷔 10주년을 맞은 밴드 고래야[경이(퍼커션), 김동근(전통 관악기), 김초롱(전통 타악기), 나선진(거문고), 고재현(기타), 함보영(보컬)]는 지난달 말 이 곳에서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 영상을 찍었다. 세계 각지에 암약하던 수만 음악 팬들이 채널 아래 몰려들었다. 영상 공개 한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삼선 슬리퍼가 드디어 NPR 채널을 탔다’거나 ‘너바나 티셔츠를 입고 한국적 크라우트록을 한다’는 댓글들이 넘실거린다.
2008년부터 시작된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는 ‘사무실 모퉁이 콘서트’의 시초를 연 세계적 음악 프로그램이다. 매달 5~7팀의 뮤지션들이 미 워싱턴 DC 소재 NPR 사무실에서 소규모 공연을 꾸린다. 웸블리도 거뜬한 콜드 플레이, 존 레전드 같은 세계적인 뮤지션들이 비좁고 밀폐된 공간에서 연주하는 희귀 콘셉트. 앞서 한국 뮤지션으로는 지난 2017년 밴드 ‘씽씽’이 유일하게 이 무대에 선 바 있다.
지난달 말 미국 공영방송 NPR의 간판 음악프로그램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 앳 홈' 촬영 차 서울 연남동 인근 사무실에서 라이브 영상을 찍고 있는 밴드 고래야. 사진/유뷰트 캡처
최근 코로나19의 장기화 여파로 국가 간 이동이 불가능해지면서 방송은 타이틀 뒤에 ‘At Home’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세계 각국 뮤지션들이 스튜디오나 집에서 촬영한 영상으로 이 시리즈를 대체하고 있다. 이 일환으로 고래야는 연남동 인근의 이 작업실 겸 사무실을 무대로 썼다.
23일 저녁 6시반 이 곳에 들어서니 자로 잰 듯 수평을 이루는 책장 선반 탓인지 흡사 태평양 건너의 NPR 사무실이 겹쳐 보였다. 밴드는 “실제로 영상이 나간 뒤 NPR 사무실과 흡사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재밌게 느꼈다”며 웃었다. 너바나와 투팍 샤커, 우 탱 클랜 티셔츠를 입고 연주한 것과 관련해선 “모두 고래야에 영향을 미친 ‘음악 유산들’”이라며 “우리 음악을 극동아시아에 국한된 이미지로만 보지 않길 바랐다. 글로벌한 흐름 안에 묻어 있는 음악이란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2010년 결성된 고래야는 대중음악과 한국 전통음악, 세계의 다양한 민속음악을 결합한 음악으로 세계에 닿아왔다. 지금까지 거쳐 온 곳만 6개 대륙 34개국 51개 도시에 달한다. NPR 출연도 어느 날 벼락처럼 성사된 게 아니다. 4년 전 첫 미국공연을 시작으로 꾸준히 문을 두드린 덕이다. 밴드는 해외에서 활발한 한국 밴드 블랙 스트링, 악단광칠이 속한 글로벌 공연에이전시 ‘소리(SORI)’와도 계약을 맺었다.
밴드 고래야.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나선진(거문고), 김동근(전통 관악기), 김초롱(전통 타악기), 함보영(보컬), 경이(퍼커션), 고재현(기타). 사진/플랑크톤뮤직
지난 20일 발표된 정규 4집 ‘박수무곡’은 이들이 세계 무대를 향해 쏘아올린 ‘축포’다. ‘국경 없는 리듬’ 박수를 근간으로 한국 전통 타악기와 관악기, 서양의 드럼세트, 일렉기타 각각의 연주를 씨줄날줄처럼 엮어 ‘무국적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탄생시켰다.
이번 음반의 프로듀서이자 브레인은 경이다. 앨범에 수록된 총 9곡의 작곡을 도맡았다. 그가 곡 스케치를 그려오면 국악 전공자인 다른 멤버들이 한국적 장단을 밀고 당겨 원초적 음악으로 재창조했다. 타이틀 박수무곡(拍手舞哭) 뜻은 한자 풀이 그대로 박수와 춤을 위한 음악이란 뜻. “공연 차 세계 페스티벌을 돌며 각 나라 고유의 리듬을 유심히 관찰했는데 재밌었어요. ‘리듬을 원초적, 범세계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 없을까...’ 박수다, 싶었죠.”(경이)
첫 곡 ‘박수소리’부터 나무조각 6개를 엮어 만든 ‘박(拍)’이 음반 전체의 ‘판’을 열어젖히면 청연한 느낌으로 박자를 쪼개는 한국 전통 악기들이 실타래 뭉치처럼 이어 붙는다. 김초롱의 장구 꽹과리 징, 김동근의 대금 소금 퉁소, 나선진의 거문고 그리고 손뼉소리들…. 전통악기들이 생성하는 일련의 영적인 기운은 이펙터를 활용한 일렉기타의 몽글몽글한 공간계 소리, 파괴적인 드러밍과 미묘하고 신기 어린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고래야의 전통 악기들은 한국의 무가나 농악에서 느껴지는 소리를 낸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고유의 영적인 깊이와 기운을 서양 록 밴드에서 흔히 얘기하는 ‘사이키델릭’과 연결시켜보고 싶었습니다.”(경이)
‘잘 자라’, ‘날이 새도록’ 같은 곡은 대중음악의 기본인 4분의 4박자보다 빠른 5박을 쓴다. 경이는 “‘잘 자라’ 같은 곡은 태평무를 출 때 반주되는 터벌림 장단에서 따온 박자”라며 “밀고 당김이 심해 원시적이고 지역색이 강한 느낌이 있지만 이를 적절히 조정해 다소 비트감이 있지만 평화롭고 몽환적인 접근으로 바꿔봤다”고 했다.
또 “5박이 주는 느낌 때문에 몇몇 곡은 음악적 개성이 더 생긴 것 같다. 실제로 농악에 가까운 느낌”이라며 “한국인들이 복잡한 박자를 갖고 노는 데 익숙했다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 박자가 빠르다는 점에선 재즈의 오드비트를 연상케도 하지만 연주자체의 접근은 그보다 쉬워 팝적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고래야 정규 4집 '박수무곡'. 사진/플랑크톤뮤직
자진모리 장단으로 시작하는 4번 트랙 ‘먼 동이 틀 때’는 센 마찰로 현을 통통 튀기는 거문고 시김새가 압권이다. 흡사 아프리카 블루스 같은 아주 원초적이고 토속적인 느낌. 거문고를 담당하는 나선진은 “거문고는 베이스 같은 저음역대부터 거친 타악기의 느낌, 고음역대의 예쁜 소리가 공존한다”며 “다양한 거문고 음색이 다채로운 고래야 음악의 큰 축을 담당한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이 곡 중간에는 아드레날린을 방출시킬 만큼 빠르고 짜릿한 다스름 박자가 포스트록 같은 전율을 일으킨다. 고음역대를 하늘거리는 대금과 드라이브를 건 하모니카 솔로, 징의 뒤섞임이 마지막까지 장대한 대곡을 완성한다.
북과 꽹과리, 징이 뒤섞여 나뒹구는 ‘떠난다’는 일렉기타의 공간계 음들과 함께 확장되며 흡사 우주를 맴도는 듯한 사운드 풍경을 그려낸다.
이번 앨범부터 보컬로 새롭게 합류한 박보영은 “국악 느낌의 곡을 진정성 있게 부르고 싶어 민요를 새롭게 배우게 됐다. ‘하나 둘 셋 넷’ 하고 타던 박자도 이젠 다른 멤버들에게 물어 ‘덩덕쿵덕’ 하며 탄다”며 웃었다. 실제로 앨범은 함경도 민요 전갑성 타령에서 따온 멜로디(‘박수소리’)나 금강산 타령에서 따온 가사(‘날이 새도록’) 등 국악 요소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미지의 바다에 잠겨 있다 수면을 박차고 올라오는 고래처럼 밴드는 비상할 준비 중이다. 코로나로 해외 공연을 하지 못하게 됐지만 오는 7월31일, 8월1일 CJ 아지트 광흥창에서 단독 공연에 나선다. “국경에 제한 없이 유영하는 자유로운 고래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신비롭지 않나요.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고단한 일들도 많았지만 앞으로 더 힘차게 나아갈 겁니다.”
이번 앨범의 시작과 끝 ‘박수’는 자신들에게 보내는 지난 세월에 대한 격려다. 코로나19로 연대의 의미가 시들해져가는 오늘날, NPR에 등장한 이 박수 소리는 자신들과 세계인들도 ‘연결’ 시켰다. 이번 음반을 여행지에 빗대보면 어떤 느낌일까.
고래야. 사진/플랑크톤뮤직
“저는 왠지 모르게 학생 때의 캠프파이어 생각났어요. 뜨거운 불 앞에서 지나왔던 나를 회상하고 반성하며 다시 희망차게 내일을 꿈꾸는...(나선진)”
“같이 울자.”(경이) “하하하”(모두들)
“저는 영화 ‘타잔’에 나올 것 같은 밀림. 국악 전공자가 아니라 소리가 날 것 같고 투박했거든요.”(박보영) “이펙팅을 아예 걸지 않는 악기들이니 본연의 질감이 잘 드러나서 그렇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네.”(경이)
설명을 덧붙이던 경이가 마무리를 한다.
“늘 해외로 투어를 다니는 건 좋지만 사실 고단한 일이기도 해요. 악기를 포장해야 하고 현지에서 또 짐을 풀어야 하고... 그런 내용을 담은 곡이 ‘왔니’ 거든요. 그래서 공항이 어떨까. 기대감과 고단함, 코로나 시기의 슬픔도 어쩌면 공존하는 곳.”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