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대중음악신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 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 차트를 가득 메우는 음악 포화에 그들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어떤 이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 ‘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네. 저는 지금 외출 중입니다. 메시지를 남겨 주세요. 삑-’(‘너를 사랑했던 걸’ 도입부)
안개 같은 음성 메시지를 지나면 시간 여행이 시작된다. 과거 세계와의 교신을 다룬 영화 ‘동감’의 주인공이라도 되듯...
미디엄 템포의 팝 재즈 사운드가 112개의 계절을 단숨에 넘어선다. 도회적 느낌의 세련된 화성과 청량한 리듬, 독주를 길게 수놓는 색소폰과 전자바이올린….
“사랑과 행복의 관계성에 대해 깊이 고민하던 시기였습니다. 곡을 쓸 때 제가 29살이었으니, 시간 참 많이 흘렀네요.”
아침(Achim) - 아침 2 (Philadelphia Session 1994) 앨범 커버. 사진/스톰프뮤직
한국 대중음악사의 숨은 명반으로 회자되는 ‘랜드 오브 모닝 캄(….Land of Morning Calm)’. 이 전설의 데뷔작만을 남기고 사라졌던 비운의 그룹 아침(Achim)이 돌아왔다. 1994년 4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만든 2집 ‘PHILADELPHIA SESSION 1994’를 27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내놨다.
5일 서울 강남구 스톰프뮤직 사옥에서 만난 멤버 유정연씨는 “당시 현지 음반사와의 마찰로 결국 발매되지 못했던 음반이 이제야 빛을 본다니 감회가 새롭다”며 웃어보였다.
모던한 팝 재즈 음악으로 시대를 앞섰던 이들은 음악적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1992년 데뷔작은 최근 젊은 세대 사이 시티팝이 부상하면서 지난해 LP, CD로 재발매되기에 이르렀다. 김현철, 봄여름가을겨울, 빛과소금에 이어 ‘시대’가 이들의 음악까지 재차 불러낸 셈이다.
“제가 80년대 때 즐겨 듣던 크로스오버 재즈, 팝 음악, 제이팝이 아침의 사운드의 모태입니다. 시티팝이란 용어는 당시 일본에도 없었고 일본과 한국에서 다분히 마케팅적으로 이용되는 측면이 있어요. 다만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가 저희 음악을 대중들에게 ‘리마인드’ 시켰다는 점에 대해서는 수긍합니다.”
2집은 유정연씨가 미국으로 홀로 건너가 프로듀싱한 앨범이다. 멜로디 가르돗, 그로버워싱톤 주니어 같은 세계적인 재즈 뮤지션들이 거쳐 간 ‘모닝스타 스튜디오’에서 2개월가량 미 동부의 유명 연주자들과 녹음을 진행했다.
빌리 조엘의 베이스를 담당했던 제프 리 존슨, 크로스오버 재즈 그룹 피시스 오브 어 드림의 리더 제임스 로이드, 전설적인 재즈 드러머 아트 브레키 그룹의 베이시스트 찰스 팸브로우, 재즈피아니스트 빌 오코넬….
처음에 ‘이름 모를 국가’에서 건너온 유정연씨를 만만히 보던 연주자들은 서서히 달라졌다고.
그는 “당시 이들의 플레이를 쉽게 ‘오케이‘ 하지 않아 별명이 ‘피키 유(Picky YOO, 까다로운 유)’ 였다”며 “처음엔 용돈이나 벌러온 듯 했던 이들이 점점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중에는 정말 동료가 됐다”고 했다.
아침의 멤버 유정연씨. 사진/스톰프뮤직
음반 속지에는 그와 함께 작업했던 연주자들의 사진이 영화 파노라마처럼 걸려 있다.
“제프 리 존슨, 찰스 팸브로우... 참여한 분들 중에는 고인이 되신 분들도 있습니다. 속지에 그 두분에게 바치는 앨범이라 적었습니다.”
앨범은 신승훈 ‘가을빛 추억’을 새롭게 편곡한 동명의 첫 곡부터 세기를 건넌다.
신디사이저, 기타, 베이스, 드럼과 같은 기본 셋에 색소폰, 전자 바이올린, 어쿠스틱 피아노를 적재적소에 운용하는 팝 재즈 사운드는 오늘날 복고 사운드를 지향하는 첨단 음악들과도 맞닿는 지점이 있다. 수록곡 ‘I DO LOVE YOU’는 그와 친분이 있던 김현철이 과거 본인 앨범에 수록을 원했던 곡이기도 하다.
유정연씨는 “반주만 들으면 외국의 팝 사운드일 것”이라며 “청춘의 사랑과 상실, 아픔을 다루지만 제 음악은 기본적으로 비극적이진 않다”고 했다.
1집 멤버였던 재즈피아니스트 이영경씨가 참여하지 않은 것과 관련해선 “한국 최고의 재즈피아니스트인 그가 1집에 불어 넣던 참신한 면들이 많았다”며 “다만 그 당시 듀오 ‘데이지’ 멤버로 활동 (가수 박광현과 결성) 중이라 아침을 계속 하자고 말하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고 했다.
1992년 데뷔작 ‘랜드 오브 모닝 캄(….Land of Morning Calm)’. 사진/벅스뮤직
서울대 기악과 출신인 두 사람은 아침 활동 뒤 각자의 음악 길을 걸어왔다.
이씨는 과거 피아니스트 야마시타 요스케의 극찬을 받은 연주자다. 김현철의 ‘그대 안의 블루’, 윤상의 ‘너에게’의 연주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재즈피아니스트로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유정연씨는 손지창, 이상우, 이문세, 신승훈 등의 대중음악 작곡가로 활동했다. 장혜진 ‘내게로’, 해이의 ‘쥬뗌므’, 핑클의 ‘영원’도 그가 쓴 작품이다. 2009년부터는 브라질, 아르헨티나로 건너가 음악에 대한 영역을 확장시켰다. 현재는 ‘안토니오 유’라는 아티스트명으로 탱고 바이올리니스트로도 활동 중이다.
“아침과 안토니오 유의 활동을 명확히 분리하고 싶다”는 그는 “향후 신곡 2곡 정도가 포함된 스페셜 앨범과 공연까지만 끝내고 아침 활동은 마칠까 한다. 요즘에는 대중음악보다는 속삭이듯 편하게 노래하는 정통 보사노바 음악 작곡에 더 관심이 간다”고 했다. 이번에 아침 2집 CD를 우선 발매하고 조만간 LP를 제작해 ‘레코드 페어’에 내놓을 예정이다.
앨범을 여행지에 빗대달라는 마지막 요청에 그가 다시 ‘타임캡슐’을 꺼냈다. 28년 전 필라델피아의 봄에 관한 회상이다.
“상업적이라기 보단, 뮤지컬하다고 해야 하나요. 정말 다른 욕심 없이 성실하게 음악을 하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1994년... 돌아보니 제 음악 생활의 분기점인 것도 같네요.”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