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태엽을 감아보면 주위에 땅 투기도 상당했다. 한 기자 선배는 A도시에 새로 지하철이 뚫릴 때 공무원에게 정류장 건립 예정지를 건네받아 인근 토지를 매입했다. 현재는 대박난 B지역이 초기에 흥행이 저조하자 해당 지자체장이나 간부직 공무원 등은 특정 단지들을 지목하며 기자들에게 매입을 권유하기도 했다.
아동학대만 해도 매가 아니라 몽둥이로 때려도 남의 집 자식이라는 이유로 참견하면 안 된다는 분위기가 분명 존재했다. 어린이집 아동학대를 취재하다가 가정 내 아동학대도 오히려 상당수라는 사실을 접한 적도 있다.
직장 회식에서 노래방에 가면 불필요한 블루스 타임이 연출되거나 서로를 희롱하는 음담패설들이 아무렇지 않게 파티션을 넘나들던 시절도 생각보다 몇 년 안 됐다. 왕따나 일진같은 학교폭력들은 용어만 바뀔 뿐이지 한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세대라면 대부분 직간접적으로 겪었을 일이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한두 해 있었던 일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에 와서 걸린 사람 입장에선 “다른 사람도 이랬는데 그 땐 넘어가고”, “왜 나한테만 이러냐”, “내가 재수가 없네” 식의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물론 걸린 사람이 그렇다고 잘못이 없다는 게 아니다. 그만큼 케케묵었고 우리를 오랫동안 좀먹었던 문제들이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문제의식이 생긴지 오래되지 않았거나 문제의식이 있더라도 방치해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섞여 있다는 점이다. 이미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도 과거 20~30년 전을 파보면 이런 일 하나둘은 우습게 나오는 게 한국사회다. 장관·총리 청문회 때마다 되풀이되고 우리는 결정적이지 못한 잘못들은 넘어가야 한다고 압박받는다.
이 정도는 누구나 한다고, 누구나 그러지 않냐고, 왜 유난을 떠냐고 하는 사이 가해자는 제때 처벌받지 못하고 피해자는 피해를 회복하지도 못한 채 넘어가 버린다. 혹 처벌이 있다해도 경미하고 그 정도는 다시 우리 공동체에서 활동하는데 아무 문제 없다. 오히려 가해자의 컴백을 환영하는 광경을 봐야 한다.
땅 투기는 결국 이해 충돌의 문제다. 정상적인 내 개인이 분석하고 판단해 투자한 게 아니라 공인으로서 업무 목적으로 취득한 정보를 개인의 영달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공적인 지위에, 혹은 공적인 업무에 종사하면서 얻은 정보를 사적으로 활용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 그러니 부동산이란 명목 아래 누구나 ‘막차’에 올라타길 바랄 뿐이다.
전수조사해서 처벌하는 것도, 재발방지장치도, 새로 법을 만들고 양형기준을 강화하는 제도적 장치도 중요하다. 더불어 우리 사회가, 지역 공동체가, 직장이, 학교가 문제 인식을 명확히 하고, 잘못을 한 사람이 그 대가를 치르기 전까지 다시 어울릴 수 없다는 공감대를 이루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피해자에게 손가락질하는 대신 보호하고 다시 사회로 일상을 영유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제는 인신매매도, 조폭도, 군대 내 폭력도, 학교 체벌도 예전보단 덜하다. 이들도 예전에는 각 시대를 뒤흔든 사회문제였지만 제도적 장치와 우리의 관심이 더해져 멀어질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문제들도 그냥 타인에게, 시간에게 맡겨만두면 우리는 또다시 제2의 사건을 접해야 하고 우리가 피해자가 될 수 있다.
분절점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엔 아동학대, 성폭력, 학교폭력, 이해충돌이 함께하면 안 된다. 이제는 잘못된 고리를 끊어야 한다.
박용준 공동체팀장 yjunsay@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