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대중음악신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 차트를 가득 메우는 음악 포화에 그들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죽어버린 밴드의 시대’라는 한 록 밴드 보컬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 ‘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코로나 장기화로 올해 1월 폐업한 에반스라운지 앞에서 만난 밴드 기프트. 이주혁(왼쪽), 정휘겸. 사진/경기콘텐츠진흥원
굳게 닫힌 철문이 묵언 시위라도 하는 듯 했다. ‘이렇게 무심할 수 있나, 당신들의 문화터전이고 소멸한다는데, 인간들은 어쩌면 그냥 동물 같아,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4일 오후, 하늘은 끝도 보이지 않을 무채색이었다. 무심하게 투명한 빗줄기들을 퍼부었다. 아직 떼지 않은 상호 간판과 벽면 덕지덕지 붙은 공연 스티커가 소리 없는 아우성을 냈다. 그 마저 빗물들에 쓸려 내려가고 있었다.
올해 1월 폐업한 홍대 라이브클럽 에반스라운지 앞. 탈색 머리의 청년들과 이 간판 아래 고사 지내 듯 잠시 숙고했다.
“옹기종기 모여 앉을 수 있는 따뜻한 공간이었어요. 벽돌 인테리어와 멋진 그랜드피아노 덕분에 런던의 펍 같기도 했고요.”(이주혁) “음악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어요. 무작정 시간 때우고 돈 벌려는 공연은 하지 않았죠. 여러 기획 무대에 올랐던 게 생각나요. 모던록 특집, 어쿠스틱 특집...”(정휘겸)
홍대 공연장이 땅에 내던져진 막대사탕 같은 처지가 돼 가고 있다. 황량한 에반스라운지 앞에서 만난 밴드 기프트 멤버들, 이주혁(보컬), 김형우(베이스), 정휘겸(드럼)은 “문화 터전이자 근간인 공연장이 사라진다는 사실이 우리에겐 먹먹하다. ‘마음의 고향이 사라진다’는 생각 때문”이라며 “처음 이 무대에 팀으로 섰을 때의 자부심과 기억은 지금 음악을 하는데도 큰 동력이 되고 있다”고 했다.
올해 1월 폐업한 에반스라운지는 간판을 아직 내리지 않았다. 비가 내리던 날, 기프트 멤버들과 이 곳에서 만났다. 사진/경기콘텐츠진흥원
기프트는 거제가 고향인 이주혁이 서울로 상경하며 2016년 결성된 팀이다. 퓨전펑크 재즈 그룹에서 활동하던 김형우, 버스킹으로 만난 정휘겸이 들어오면서 지금의 진영이 갖춰졌다.
다수 경연 방송과 대회 출연으로 대중들에게 각인돼 있지만, 혜성처럼 등장한 팀은 아니다. 결성 직후부터 길거리 버스킹, 라이브 클럽 공연을 전전하며 인디신에 뿌리 내려왔다. 2019년 JTBC ‘슈퍼밴드’에서 이주혁과 김형우는 보컬과 베이스 연주자로 두각을 나타냈다. 지난 1월 종영한 엠넷 ‘포커스’에서는 준우승을 거뒀다.
“TV의 전파력이 큰 것은 사실이나 직접 공연장에서 ‘이게 음악 하는 거구나’ 많이 느껴요. 직접 보러 와주시는 분들의 그 소소한 마음 하나하나 정말 소중하죠. 버스킹 시절부터 깨달은 거예요.”(이주혁. 김형우)
이주혁의 맑고 신비롭게 느껴지는 고음은 밴드 사운드의 중추다. 모던 록과 포크, 팝 감성의 장르들이 모두 이주혁의 입을 투과해 기프트란 스펙트럼으로 발화한다. 텔레캐스터 기타의 깔끔한 사운드 톤과 영롱한 신스 사운드, 재즈학도였던 김형우의 베이스 핑거링, 이를 뒷받치는 김휘겸의 드럼 비트. 올해 3월 발표한 EP ‘넌 나에게’에서도 이들의 사운드는 일순간 피톤치드향 가득한 시공으로 청자를 데려간다.
“새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를 샘플링으로 써봤습니다.(2번 곡 ‘그런 사람’) 봄의 계절 감각이 잘 묻어날 수 있도록, 가볍고 하이한 신스음도 비교적 많이 썼던 것 같고요. 그간 저희가 해온 방식은 주로 우울한 느낌의 위로였지만 이번엔 따뜻한 위로를 직설적으로 해보고 싶었어요.”(이주혁)
밴드 기프트. 김형우(왼쪽부터), 이주혁, 정휘겸. 사진/경기콘텐츠진흥원
음반은 거리두기가 장기화되고 있는 오늘날, 우리 일상에 관한 이야기다. 이주혁은 “코로나 이후 개인적으로 힘든 상황이 많았다”며 “평소 개인적인 이야기를 주변에 잘 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이번엔 주변 친구와 가족에게 털어놔 봤다”고 했다.
“전화 한 통만으로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 역시 용기라는 사실도요.”(이주혁)
음반과 동명의 타이틀곡은 영화 ‘안녕, 헤이즐’을 보고 풀어낸 곡이다. 불치병에 걸린 주인공이 사랑을 깨닫고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내용이다. 이들은 최근 바이올린 같은 현악의 비중도 늘리고 있다. 킹스오브컨비니언스, 데미안라이스 같은 음악가들에 관심이 생기고 있다고 했다. 마지막 트랙 ‘좋은 꿈일 것 같아’는 전면에 나서는 통기타의 스트로크가 풍성한 현악과 뒤섞이는 세련된 포크풍의 곡이다. ‘기대어 가는 법’이 원제다.
밴드 기프트. 김형우(왼쪽부터), 이주혁, 정휘겸. 사진/경기콘텐츠진흥원
최근 기프트는 믹싱과 마스터링 등 후반 작업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이주혁은 2014년 밴드 넬의 ‘시티브레이크’ 무대를 본 전후가 자신의 음악생활 분기점이라고 했다. 그는 “그 전까지는 노래를 어떻게 하면 잘 부를까에만 집중했던 것 같다. 밴드를 하려면 자작곡이 있어야 하는구나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됐다”고 했다.
기프트는 최근 넬 김종완에게 아직 공개되지 않은 데모 음원도 처음으로 보냈다. 후반 작업과 프로듀싱에 관한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음악의 기승전결이 잘 살 수 있도록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믹스 부분에서 보컬의 더블링 녹음으로 버스 부분을 더 살려 보면 괜찮지 않겠는지, 기타 8비트 스트로크를 더 넣어보면 어떨지 같은 의견들을 물어봐주셨어요. 저희들에게는 밴드이자 프로듀서로서의 롤 모델이에요.”(이주혁, 정휘겸)
극장에서 상영된 CJ 문화재단 '아지트 라이브 프리미엄' 기프트 무대. 사진/유뷰트 캡처
신곡의 자연적인 미학은 초록빛 영상들과도 균형을 이룬다. 최근 CJ문화재단의 ‘아지트 라이브 프리미엄’ 일환으로 극장에서도 상영된 이들의 영상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앨범을 특정 공간에 비유해달라는 물음에도 이들은 모두 망설임 없이 “제주도”라 했다.
“3번 트랙 ‘하늘 바람 별 여행’은 소중한 주변 사람과 여행을 가서 들으면 좋을 곡입니다. 저는 제주도에서 드라이브하는 상상이 들곤 해요. 2번 트랙 ‘그런 사람’이나 4번 트랙 ‘좋은 꿈일거 같아나’는 특히 밤에도 잘 어울릴 것 같아요.”(이주혁)
“생각해보니 제주도에 다 있네요. 하늘도, 바람도, 별도. 그리고 산도. 하하”(정휘겸)
“다 같이 ‘하늘 바람 별 그리고 여행’을 부르며 해안 도로를 드라이브 해보세요.”(김형우)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이번 밴드유랑은 코로나19로 대중음악 공연장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밴드신과 공연장을 조명하고자 경기콘텐츠진흥원과 특별 기획한 인터뷰입니다. 지니뮤직 매거진 내 ‘경기뮤직’ 카테고리에 연재되는 코너에서는 재편집한 글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