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태의 경제편편)과연 '빨리빨리'의 나라인가

입력 : 2021-10-06 오전 6:00:00
필자가 1980년대에 철강회사에서 고철수입 업무를 담당할 때였다. 고철은 2~3개월마다 벌크선에 실려 왔다. 하역을 예정기일보다 빨리 끝내면 수출업자로부터 보상을 받고, 기일보다 늦으면 벌금을 내게 돼 있었다. 그 당시 하역은 대한통운이 맡았는데, 기한보다 늦게 끝낸 적이 단 1차례도 없었다. 언제나 일찍 끝내고 선박을 떠나보냈다.
  
그 무슨 일이든 예정보다 앞당겨 일을 끝내는 것은 한국기업의 장기 가운데 하나였다. 그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돌관작업'을 해서라도 재빨리 마무리하고 해결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한국 기업과 사회에는 '빨리빨리' 문화가 형성됐다. 
 
그러다 보니 빨리빨리는 오늘날 한국과 한국인의 특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조어의 하나가 됐다.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그 덕분에 한국이 고도성장을 성취하고 불과 반세기 만에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다는 평가에 누구나 동의한다.
 
반면 너무 조급하게 서두르는 나머지 엉성하게 처리하는 악습이 고질화했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과거 성수대교 사건이나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그리고 1997년 외환위기 등이 이런 조급증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다. 요즘도 그 악습은 사라지지 않고 큰 사고를 내곤 한다.
 
그런 마음 아픈 사연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인의 일하는 속도가 빠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를테면 코로나19 사태에 따라 지급된 국민재난지원금도 신청부터 지급까지 참으로 빠르고 편리하게 처리됐다. 
 
그렇지만 중요한 사안이 처리되는 과정을 보면 한국이 정말로 빨리빨리의 나라인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납득할 수 없게 오래 걸리는 일이 허다하다.   
 
예컨대 제2금융 및 대부업권 관련 금융분쟁 조정이 지연되고 있다. 국민의힘 윤창현 의원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제출받은 '비은행·여전·대부 분쟁조정 현황'을 전한 보도에 따르면, 올 상반기 '인용'이 결정된 사건의 평균 처리기간은 104일로 전년보다 34일 늘어났다. '기각'으로 판정된 사건은 역시 197일로 79일이나 길어졌다.  
 
라임펀드 불완전판매 사건의 경우 금융감독원이 지난해 11월 금융회사 최고경영자 제재를 결정했지만, 금융위는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삼성생명의 요양병원 암 입원보험금 미지급건에 대한 제재 안건 역시 200일이 지나도록 미결 상태다.
 
산업재해 피해노동자 처리기한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지난달 20일 연합뉴스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박대수 의원(국민의힘)이 산재재심사위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의거해 보도한 기사에 따르면 산업재해 재심 처리에 평균 135일이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전체 사건의 99.98%를 차지하는 4387건이 법정처리기간 60일을 초과했다. 기일을 지키는 사건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기일초과 비율도 해마다 높아지고 있다.
 
산업재해 재심이 신속하게 마무리되어야 피해노동자들이 원직복귀나 치료비용 부담 등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 설사 노동자에게 불리한 결정이라도 신속해야 곧바로 후속대응에 나설 수 있다. 반대로 결정이 늦어지면 산재를 당한 노동사들의 치료비 마련이나 직장 구하기는더 어려워진다.
 
검찰의 수사나 사법부의 재판도 기일이 부지하세월로 늦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헌법에는 국민 누구나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명시돼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유명무실한 것이 사실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간다.  
 
산재심의위 심사나 법원의 재판이 신속하게 진행되려면 무엇보다 인력이 충분히 확보돼야 한다. 정부와 국회가 협의해 함께 힘써야 하는데, 지금 어느 쪽도 그럴 자세가 되어있지 않은 듯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처럼 국민들의 삶과 생활보호를 위해 중요한 일의 처리는 기약 없이 늦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한국이 빨리빨리의 나라라는 말도 공허하게 들린다.
 
빨리빨리 문화는 주어진 업무처리를 빠르고 정확하게 마무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니 계속 이어가는 것이 절대 나쁘지 않다. 국민들의 활력이 증진되고, 경쟁력도 강화될 수 있다. 부당하게 처리를 지연시키는 경우 그 요인을 찾아 개선해야 한다. 특히 중요한 사안에서 국민들의 삶을 부당하게 짓누르는 지연처리 문제는 하루빨리 해결돼야 하겠다.
 
차기태 언론인(folium@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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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