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익도의 밴드유랑)윤지영 MI 총장 “K팝은 미국 내 주류 음악”

‘할리우드 케이팝 전도사’...“높아진 한국 문화 위상 절감”
록스타 배출해낸 미 실용음악 명문대 “BTS 프로덕션 배우자”

입력 : 2021-12-09 오후 4:41:22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에메랄드빛으로 설계한 ‘음악의 전당’을 누비는 기분이었다.
 
스티비 원더, 토신 아바시(제너레이션 액스) 같은 음악가들 사진이 길게 도열된 복도를 지나면 스티븐 카펜터(데프톤즈)의 벽면 장식용 ESP 9현 기타가 번쩍였다.
 
다채로운 눈 색깔의 국적, 연령 불문의 음악 학도들 사이에서는 이 학교 졸업생이자 조교를 역임한 앤더슨 팩(실크소닉)의 그래미 후보 소식이 연일 뜨거운 감자였다.
 
“세계적인 연주자를 배출해온 것은 우리 자부심이죠. 물론 팬데믹 여파는 있지만 한편으론 음악 교육의 창조적인 길을 모색하는 계기도 되고 있습니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방문한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내 MI(뮤지션스 인스티튜트·Musicians Institute). 사진/로스앤젤레스=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내 MI(뮤지션스 인스티튜트·Musicians Institute)에서 만난 윤지영(레이첼 윤) 총장이 말했다.
 
윤 총장은 클래식 학도 출신이다. 서울대 작곡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1993년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에서 작곡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대중음악에 대한 관심으로 MI에 발을 들였다. MI의 교수(2005), 학장(2011)을 거쳐 2018년부터 6대 총장을 맡고 있다. 여성 총장, 동양인 총장은 그가 MI 사상 최초다.
 
1977년 설립된 MI는 동부 보스턴의 버클리음대와 함께 미국 양대 실용음악 대학으로 꼽힌다. 연주자들에게는 폴 길버트(미스터 빅), 채드 스미스(레드 핫 칠리 페퍼스), 스티브 바이(제너레이션 액스), 프랭크 갬벌(리턴 투 포에버) 같은 명연주자를 배출한 ‘꿈의 학교’로 통한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내 MI(뮤지션스 인스티튜트·Musicians Institute) 내 복도. 21세기 들어 주목받는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거스리 고반과 토신 아바시가 MI를 방문한 당시 사진이 걸려 있었다. 사진/로스앤젤레스=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그러나 윤 총장은 이 학교의 악기 중심 학제를 깨는 데 주력해왔다. 학장 시절 개설한 ‘K팝 라이브 연주 워크숍’ 강좌는 오늘날 총제적인 K팝 프로덕션을 아우르는 ‘K팝 아카데미’로 발전을 거듭해왔다. LA 소재 한국문화원과 협약을 맺고 K팝 댄스·보컬·프로듀서 강사를 한국에서 초빙하는 3주 프로그램을 1년에 한 번씩 열고 있다. 방탄소년단(BTS) 열풍이 확대되면서 현지 학생들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BTS의 댄스나 믹싱, 프로모션 강의가 진행되는 날이면 복도는 북새통을 이룰 정도로 열기가 뜨겁다.
 
“학장 시절 제가 K팝 강의를 개설하겠다고 하면 ‘미국 R&B 표절 음악이 아니냐’는 시선이 많았어요. ‘브라질리언’과 ‘아프로큐반’ 같은 별도 영역이 아니었으니까. 그걸 깨준 게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이었고, 지금은 BTS 열풍으로 미국이 뒤집혔죠. K팝이 세계 대중음악 주류로 부상했다는 것을 체감합니다.”
 
K팝 현상은 ‘문화 용광로’ LA 한복판 위치한 이곳 학구열도 연일 달구고 있다. 윤 총장은 “이제 (K팝을) 단순히 한국 음악이라고만 규정짓기 힘든 시대”라 했다. 실제로 이 학교를 나온 세계 각지 출신의 연주자들 중 K팝 프로듀서를 자처하는 이들도 상당수다. “음악 제작은 점차 여러 사람과 협업해야만 하는 구조로 바뀌고 있어요. 예쁘고 세련되게 녹음하고 홍보하는 K팝 특유 프로덕션은 이제 메이저 영역이자 선두주자이지요.”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내 MI(뮤지션스 인스티튜트·Musicians Institute) 내에서 만난 윤지영(레이첼 윤) MI 총장. 사진/로스앤젤레스=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최근 윤 총장은 중국 음악 대학과 한국 백석대, 태국 마히돌대를 연계하는 ‘실용음악과 K팝 교육 프로젝트’도 구상 중이다. 그는 “한때 ‘K팝 학과’까지 창설하겠다는 포부도 있었지만 팬데믹으로 국경이 끊기면서 여의치 않게 됐다”면서도 “아이디어는 여전히 무궁무진하다. K팝과 한류가 거센 중국을 교두보로 삼고 뭔가를 만들어내고 싶다. 한국 가수들을 초청하는 기획 공연을 열 계획도 있다”며 눈을 반짝였다.
 
현지의 높아진 한국 문화 위상도 새삼 절감한다. 마블과 디즈니 캐릭터 사이 BTS, 기생충, 오징어게임으로 뒤덮인 거리는 이제 꿈이나 환영이 아니다. 세계로 뻗어나가는 K콘텐츠 근원을 파다 보면 한국인 특유의 성실함, 꼼꼼함이 있다는 분석이 있다. 윤 총장 역시 수긍했다.
 
“저도 한국에서 배운 대로 고지식하게 했을 뿐이에요. 내게 주어진 일 열심히 하고 꼼꼼하고 충실하고 솔직하고. 교육자로서는 제 학생 때를 떠올리며 늘 다짐해요. ‘사회에서 필요한 것을 미리 알려줘야 한다’고. 제가 했던 시행착오를 격지 않게, 시야를 넓혀주는 게 제 역할이에요.”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내 MI(뮤지션스 인스티튜트·Musicians Institute) 내 라이브러리. 스티븐 카펜터(데프톤즈)의 벽면 장식용 ESP 9현 기타와 로버트 데레오(스톤파일럿츠)의 쉑터 베이스가 전시돼 있다.사진/로스앤젤레스=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버클리가 재즈, 노스텍사스가 비밥에 집중한다면 MI는 ‘컨템포러리’를 전문으로 한다. 2013년부터는 영화 음악으로도 범위를 확장했다. 1년에 10일 특별 클래스 ‘스코어링 클래스 필름 인텐시브’를 듣기 위해 세계 전역의 영화 음악 학도들이 이 기간 할리우드로 날아온다.
 
“음악에 경계란 없어요. 모든 것이 하나로 통섭되는 결과물이죠. 이제 홀로서기로 성공하기는 힘든 시대에요. 팀웍 단위로 움직이는 것이 음악계 표준이죠. 작곡과 연주, 편곡, 믹싱, 프로듀싱까지 여러 사람과 호흡하는 법을 기르는 게 중요해요.”
 
미국 사회 소수자로서 음악교육계 정상에 선 그는 팬데믹 후 번지고 있는 ‘아시안 헤이트’에 대해서도 소신을 밝혔다.
 
“인종을 떠나 누군가를 혐오한다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이죠. 혐오 자체가 아닌데 혐오라 하거나 차별이 아닌데 차별이라 부르는 것에도 반대합니다. 누구를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없어요.”
 
세계 대중문화 산업 중심지인 이 곳 역시 팬데믹이 크게 체감되고 있다. 할리우드의 화려함 뒤 그림자는 한 뼘 더 커졌다. 미국 정부가 지원하던 실업수당 ‘CARE’를 받지 못하는 학생들이 늘어감에 따라 학교 차원에서도 ‘푸드 뱅크(음식 기부)’를 운영하는 등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최상의 음향장비를 투입해 세계 각지 학생들을 잇는 화상 교육에도 나서고 있다. 윤 총장은 “경제적으로 힘든 한인타운 자녀들이 K팝 관련 꿈을 잃지 않도록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모든 게 올스톱된 상태지만 어떻게든 똘똘 뭉쳐 최상의 시스템을 찾고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모습에 뭉클했습니다. 이 고통의 시기가 결국엔 더 좋은 방향으로 우리를 끌어줄 것임을 압니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내 MI(뮤지션스 인스티튜트·Musicians Institute) 내 한 스튜디오. 이 학교에는 현대 최신 음향 장비를 구축한 공연장들이 많다. 최근 영국 출신 세계적인 밴드이자 BTS와 협업한 콜드플레이도 공연 겸 탐방을 하러 이 곳을 방문했다. 사진/로스앤젤레스=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로스앤젤레스=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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