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기철 기자] 조부모도 손자를 입양할 수 있다는 첫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다만, 조부모가 입양 요건을 갖출 것과 입양이 자녀의 복리에 부합하는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허용된다는 취지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23일 A씨 부부가 외손자를 입양하겠다며 낸 미성년자 입양 허가 청구소송 재항고심에서 입양을 불허한 원심을 파기하고 심리를 더 하라며 사건을 울산지법으로 이송했다.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조부모가 손주를 입양할 수 있는지에 관한 사건 등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자리에 착석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입양 요건+자녀복리 충족해야"
재판부는 "미성년자에게 친생부모가 있는데도 그들이 자녀를 양육하지 않아 조부모가 손자녀의 입양허가를 청구하는 경우, 입양 합의 등 입양 요건을 갖추고 입양이 자녀의 복리에 부합한다면 입양을 허가할 수 있다"며 "구체적 심리와 비교·형량의 과정 없이, 전통적인 가족공동체 질서의 관점에서 혈연으로 맺어진 친족관계를 변경시키는 것이 혼란을 초래하거나 자녀의 정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막연히 추단해 입양을 불허해서는 안 된다"고 판시다. 또 "조부모가 부모·자녀 관계를 맺기 위해 입양을 청구한다고 해서 후견 제도의 존재를 이유로 불허할 것도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민법은 존속을 제외하고는 혈족의 입양을 금지하고 있지 않고, 조부모가 손자녀를 입양해 부모·자녀 관계를 맺는 것이 입양의 의미와 본질에 부합하지 않거나 불가능하다고 볼 수도 없다"며 "조선시대에도 혈족을 입양하거나 외손자를 입양하는 예가 있었다"면서 "조부모의 손자녀 입양이 우리의 전통이나 관습에 배치된다고 할 수 없고, 비교법적으로 혈족의 입양을 허용하는 예가 많다"고 설명했다.
조부모의 입양이 손자녀의 복리에 부합하는지에 대해서는 매우 세심하고 까다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자녀 복리에 미칠 영향 세심히 살펴야"
재판부는 "양부모될 사람과 자녀 사이에 조손관계가 존재하고 있고, 입양 후에도 양부모가 자녀의 친생부모라는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법원은 이런 사정이 자녀의 복리에 미칠 영향에 관하여 세심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특히 "조부모가 단순한 양육을 넘어 양친자로서 신분적 생활관계를 형성하려는 실질적인 의사를 가지고 있는지, 입양의 주된 목적이 부모로서 자녀를 안정적·영속적으로 양육하고 보호하기 위한 것인지, 친생부모의 재혼이나 국적 취득, 그 밖의 다른 혜택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닌지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법원은 가사조사나 상담 등을 통해 친생부모에게 관련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고, 친생부모가 자녀를 스스로 양육할 의사가 있다면 입양 동의를 철회하도록 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입양되는 자녀가 13세 미만인 경우에도 자녀의 나이와 상황에 비춰 적절한 방법으로 자녀의 의견을 청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조부모의 양육능력이나 양부모로서의 적합성과 같은 일반적인 요건 외에도 △자녀와 조부모의 나이 △현재까지의 양육 상황 △입양에 이르게 된 경위 △친생부모의 생존 여부나 교류 관계 △입양이 자녀에게 도움이 되는 사항과 우려되는 사항에 대한 비교·형량 등을 자세히 따져, 개별적·구체적인 사안에서 입양이 자녀의 복리에 적합한지를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대의견 3명도 "자녀복리 최우선"
조재연·민유숙·이동원 대법관 등 3명은 반대의견을 냈다. 자녀로 하여금 정체성에 혼란을 야기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다수의견과 결론은 다르지만 자녀의 복리를 최우선해야 한다는 기본적 시각은 같았다.
조 대법관 등은 "직계혈족인 조부모가 손자녀를 입양하는 것은, 혈연관계 없이도 법률에 따라 친자관계를 인정하는 법정친자관계의 기본적 의미에 자연스럽게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특히 "조부모가 입양 사실을 비밀로 하고 친자녀인 것처럼 키우기 위해 입양을 하는 경우, 양부모로서 양육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입양 의사를 인정하기 어렵다"면서 "입양 사실을 숨기는 상황에서는 자연스러운 양친자관계가 형성될 것을 기대하기 어렵고, 향후 자녀의 정체성 혼란을 야기할 우려가 크다"고 설명했다.
또 "조부모는 친생부모의 자녀 양육을 지지하고 원조할 지위에 있는데도, 조부모가 입양을 통해 부모의 지위를 대체하고 친생부모의 지위를 영구적으로 박탈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도 주장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반대의견에 대해 "이번 사건의 경우 여러 사정에 비춰 조부모의 입양이 사건본인의 복리에 적합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고교생 딸이 출생 7개월만에 맡겨
A씨 부부는 고교생이던 딸이 출산 7개월만에 두고 간 손자를 키워왔다. 손자는 말을 배우면서 A씨 부부를 엄마·아빠로 알고, 호칭도 그렇게 불러왔다. 초등학교 입학이 다가오면서 손자가 받을 충격을 걱정한 A씨 부부는 법원에 일반입양을 청구했다. 아들과 교류가 없었던 딸과 친부도 동의했다.
1심은 A씨 부부의 입양허가 청구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친생모가 생존하고 있어, 재항고인들이 사건본인을 입양하면 외조부모가 부모가 되고 친생모는 어머니이자 누나가 되는 등 가족 내부 질서와 친족관계에 중대한 혼란이 초래될 우려가 있다"고 했다.
또 "현재상태에서 미성년후견을 통하는 것이 가능한 데다가 장래에 손자가 진실을 알게 돼 받을 충격 등을 고려하면 신분관계를 숨기는 것보다 정확히 알리는 것이 손자에게 이롭다고 볼 여지도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A씨 부부가 항고했으나 2심 역시 같은 판단을 내렸다.
최기철 기자 lawch@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