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회색 하늘에서 투명한 붓질이 내려오면, 1998년 그의 6집에 실린 곡이 떠오릅니다. ‘서울도 비가 오면 괜찮은 도시’.
"어릴 적엔 왜 그렇게 레코드 가게들에서 스피커를 밖에 놓고 음악을 틀었는지 몰라요. 그때 처마에서 뚝뚝 떨어지던 빗소리를 들으며 이번 음반 얘기를 나눠보면 어땠을까요?"
26년여 만에 비에 관한 곡으로 돌아온 싱어송라이터 김현철이 말했습니다. 비(雨)는 그의 오랜 음악 캔버스이자 감수성. 최근 연남동의 한 LP바에서 그가 새로운 ‘우가(雨歌)’를 틀어주는데, 도입부 비와 천둥의 '앰비언스(소리를 채집해 만든 환경음)'가 공간을 투명하게 물들이는 것 같더군요. 영화 '4월 이야기'에서나 볼 법한 이와이슌지 풍 색감과 미장센처럼.
최근 그는 비에 관한 신곡 '투둑투둑'을 담은 12-1집을 냈습니다. 왜 다시 비냐고 묻자 "일기예보가 정확치 않던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돌아보게 됐다. 아침이면 맑을지 아닐지 모르는 상황에서 내리던 '때 아닌 비'에 관한 기억들을 다시 담아보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김현철 12-1집 '투둑투둑'. 사진=FE엔터테인먼트
신곡 '투둑투둑'은 어린 시절 누구나 경험해봤을 법한 첫사랑과 비에 대한 기억을 액자식으로 구성한 단편 영화 같은 노래. 트럼펫 선율이 주도하는 도회적 사운드 위로 멜로우(mellow·자연적 즐거움을 긴장 푼 상태에서 조용히 즐기는 상태)한 목소리가 회화적으로 들립니다. '전조(轉調·악곡의 진행 중 계속되던 곡조를 다른 곡조로 바꿈)'를 곳곳에 배치해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회자를 그려냅니다.
"어린 시절 비를 피하러 간 레코드 가게 처마 밑에서 어깨가 닿는 묘한 떨림을 순수하고 맑은 느낌으로 그려본 곡입니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비가 또 다시 그 날 그 장소의 기억들을 소환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젊은 줄도 모르던 우리의 지난 젊은 날'이란 어떤 걸까, 곡을 쓰며 계속 생각했어요."
음반에는 '서울도 비가 오면 괜찮은 도시'를 비롯해 1집의 '비가 와(1989)'도 새롭게 편곡해 넣었습니다. 깨질듯이 여린 원곡보다 사운드는 꽉 차있고 세련됐지만, 오롯한 비의 감성은 세월 격차를 단숨에 뛰어넘습니다.
'서울도 비가 오면 괜찮은 도시'는 성수대교 남단 사거리에서 갑자기 쏟아져 내린 비의 슬로우 비디오 같은 잔상을 이후 음표로 그린 것. “그깟 사랑 하나 때문에” 스스로 책망하는 화자의 마음과 뒤섞여 나뒹구는 비의 풍경이 교차합니다. 결국 비란 김현철 넘어 인간의 젊은 시절과 사랑의 초상(肖像) 같은 것. 신곡부터 가수 장혜진을 위해 작업했던 '우(雨·1994)'를 다시 부른 곡까지, 음반 전체는 톤이 일정한 ‘비 오는 날의 수채화’ 같습니다.
26년여 만에 비에 관한 곡으로 돌아온 싱어송라이터 김현철. 사진=FE엔터테인먼트
작·편곡 과정에서 김현철은 컴퓨터를 토대로 음악을 만듭니다. 베이스와 기타, 드럼을 가상 악기로 따놓으면 오랜 시간 그와 함께 하는 지음(知音)들, 조삼희(기타), 이태윤(베이스), 이상민(드럼)은 살아 있는 연주들로 화답해줍니다. 장효석(색소폰), 최재문(트롬본), 박준규(트럼펫)은 곡마다 솔로로 나서거나 뒤에서 받쳐주며, 비의 아련한 잔상을 입혀냅니다.
"30여년 전이나 지금 부른 비에 관한 감성이 사실 많이 달라졌을까봐 고민이었어요. 근데 막상 해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던데요. 모든 게 바뀌었을지 몰라도, 결국 그 날, 그 자리에 내리던 비는 바뀌지 않았다는 거, 비를 한 번이라도 맞아봤던 사람들은 아마 알 것입니다. 비에 대한 추억은 내가 맞아봐야 안다는 걸."
연말 눈(雪)에 관한 테마의 앨범 12-2집과 합쳐 LP로 제작할 계획입니다. 1집 ‘눈이 오는 날이면’과 3집 ‘횡계에서 돌아오는 저녁’에서 보여주던 그 겨울 정서를 터치할 수 있을까. “지금은 혼자 컴퓨터로 작업하고 있어서 시티팝이 될지, 발라드가 될지 알 수 없어요. 아내 생일에 맞춰 선물을 해주고 싶은데 결국 사랑에 대한 얘기가 되겠죠?”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