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아침 해처럼 붉게, 스크린 위로 투사되며 올라가는 낮(◑)과 밤(◐)을 상징하는 기호, 휘파람 소리처럼 들리는 키보드의 심플한 음들과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관계의 불균형성에 대한 고찰적 가사….
17일, 서울 강서구 KBS아레나홀에서 열린 영국 일렉트로닉 팝 듀오 혼네(Honne)의 단독 공연. 첫 곡으로 'IDGAF ABOUT PAIN'를 연주하는 이들이 흡사 사랑이라는 개념을 깎아가는 음(音)의 세공사처럼 느껴졌습니다. 사랑의 불가해성에 대한 담론을 이해하기 쉬운 멜로디로 꾹꾹 짚어가며, 결국 그 본질과 형태를 서서히 마주보게 하는.
17일, 서울 강서구 KBS아레나홀에서 열린 영국 일렉트로닉 팝 듀오 혼네(Honne)의 단독 공연. 사진=프라이빗커브
'IDGAF ABOUT PAIN'은 지난 2021년 발표한 정규 음반 '일주일 후에 세계가 끝났다고 치자, 어떻게 할 건가요?(LET’S JUST SAY THE WORLD ENDED A WEEK FROM NOW, WHAT WOULD YOU DO?)'의 첫 수록곡. 연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고통을 받아들이기도, 또 시큰둥한 관계로 나아가며 냉담하기도, 그러다가 다시 또 화합하기도 하는, 사랑에 관한 철학을 함축한 음반입니다. 이 음반의 외계인의 신호처럼 들리는 사이렌 소리나 불협화음은 관계의 오해를, 다시 또 아름다운 선율을 쌓아가는 합창 세례는 서로 간의 화해를 꼭 암시하는 것만 같습니다. 전자 선율로 그린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사랑의 형태)'랄까.
2014년 영국 런던에서 결성된 혼네(Honne)는 제임스 해처(프로듀서)와 앤디 클러터벅(보컬 겸 프로듀서)으로 구성된 듀오입니다. 대학생 시절 열혈 록 키드였던 두 사람은 라디오헤드를 들으며 "전작보다 혁신적인 신작"을 추구하는 태도를 가져왔습니다. 나른하고 편안한 전자음, 그러나 기타를 멜 때 만큼은 거친 록으로 전복하는 이들 음악 세계관에 ‘혼네(本音)’라는 일본어를 붙였습니다. 우리 말로 ‘속마음’, ‘진심’이라는 뜻.
4년 전 본보 기자와 인터뷰 때 "음악을 만들 땐 순간의 느낌에 집중한다. 피아노를 치다가도 몰입하면 코드 하나라든지, 소리 자체를 아이폰에 녹음하고, 거기서 이야기의 여러 캐릭터를 얻고 풍성해지도록 초점을 맞춘다”(앤디)고 한 바 있습니다.
17일, 서울 강서구 KBS아레나홀에서 열린 영국 일렉트로닉 팝 듀오 혼네(Honne)의 단독 공연. 사진=프라이빗커브
클래식한 소울에 감각적인 신스 음을 뒤섞는 음악은 세계에서 대표적인 ‘감성 음악’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데뷔곡 ‘웜 온 어 콜드 나이트(Warm On A Cold Night)’이 광고 음악으로 사용되며 점차 유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밤의 무드와 어울리는 곡들에서 시작해 낮("햇빛 찬란한 감정(앤디)")에 관한 곡들, 그리고 최근에는 세계 종말의 사랑 이야기까지 범위를 넓혀왔습니다.
이날 무대에서 이들이 라이브로 서서히 음을 구현하기 시작하자, '시몬스' 같은 포근하고 편안한 촉감이 홀을 끌어안기 시작했습니다. 키보드에서 기타로 전환한 'Me & You', 전체가 핑크색 조명으로 바뀌던 'Free Love'를 지나고서 4년 만에 만난 한국 관객들과 교감했습니다. 직접 무대 아래로 내려가 "공연이 좀 지연되어 미안하다"며 손을 꼭 잡아주거나, 한 관객에게 배운 한국어로 "폼 미쳤다"를 따라해 현장 웃음을 지어냈습니다.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사랑해요, 고맙습니다."(앤디) "월드 투어 중 첫 국가이자, 우리가 정말로 좋아하는 국가 중 하나인 한국에 오게 돼 기분이 좋습니다. 어제 아이를 재우느라 잠을 못잤지만, 오늘 공연 다들 즐겨주세요."(제임스)
17일, 서울 강서구 KBS아레나홀에서 열린 영국 일렉트로닉 팝 듀오 혼네(Honne)의 단독 공연. 사진=프라이빗커브
주로 컴퓨터(시퀀스) 사운드를 활용해 만드는 이들의 음악은 라이브 현장에선 다양한 악기들, 감각적인 영상·조명 활용이 곁들여져 색다른 미학으로 구현됩니다. 이날도 'Location Unknown'을 녹음에 실리지 않은 원본 형태로 직접 앉아 연주하며 들려주거나, 'Shrink' 때 라디오헤드 같은 스타일의 기타 후주를 더할 때 곡 자체의 생동감을 느껴볼 수 있었습니다. 커튼 같은 무대 뒤 스크린으로 오렌지색의 실루엣이 드리우는가 하면('306'), 수백개의 나비 모양 디자인이 날아가는('Sometimes') 연출도 더해졌습니다.
공연 후반부부터 앙코르까지 이어지는 'Warm On a Cold Night(OACN)'-'No Song Without You'-'Day 1' 때 후주를 길게 늘어뜨려 관객들과 떼창을 한 직후. 이들이 음으로 그리는 사랑의 형태가 마무리됩니다. 앤딩크레딧처럼 올라가는 귀여운 그림과 형형색색의 알파벳 영상, 몽롱한 전자음이 피날레. "지금 아무리 극심한 시기라도 내일 태양은 다시 또 밝게 뜰 거예요. 단지 조금 더 웃어봐요."
17일, 서울 강서구 KBS아레나홀에서 열린 영국 일렉트로닉 팝 듀오 혼네(Honne)의 단독 공연. 사진=프라이빗커브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