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이 뜨겁습니다. 두어 달 동안 이어지고 있는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측과 이에 맞선 영풍, MBK파트너스 연합의 공방은 공개매수를 거쳐 급기야 대규모 유상증자 결정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고려아연 경영진은 그동안 ‘국부 유출’, ‘약탈적 사모펀드’ 등 약발 잘 드는 고전적 구호를 내세웠지만 그걸로는 열세에 놓인 지분율 싸움을 뒤집을 순 없다고 판단했는지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위기에 처한 경영진이 무슨 말을 하든, 무리수에 가까운 결정을 내리든, 인간적으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경영권 방어를 위해 마다할 것이 없겠죠. 물론 동의한단 뜻은 아닙니다. 다른 이들도 특히 이해당사자라면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선 안 됩니다. 그 이해당사자가 거액의 국민 재산을 운용하는 국민연금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번 경영권 분쟁은 박빙의 주식지분 확보전으로 진행 중입니다. 누구도 과반을 확보하지는 못해 나머지 주주들이 누구 편을 들 것인지가 매우 중요한 상황입니다. 설령 이번에 발표한 유증이 법원에 의해 중단되지 않고 성공에 이른다고 해도, 결국엔 고려아연 지분 7.48%를 갖고 있는 국민연금이 누구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사안의 화제성이 높다 보니 고려아연에서 벌어지는 경영권 싸움은 지난 국정감사에서도 도마에 올랐습니다. 의원들은 주로 국부 약탈에 포커스를 맞춘 질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국민연금의 답변은 실망스러웠습니다. 김태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충분히 논의할 것이고 그때 가서 ‘의결권을 행사하겠다’는 취지로 답했습니다.
일반적인 경우였다면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코드에 충실해 의결권을 적극 행사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번엔 다릅니다.
고려아연의 주가는 양측의 혈투로 인해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평상시 50만원대에 머물러 있던 주가가 무려 150만원을 넘어서기도 했습니다. 지금 증권가의 어느 누구도 고려아연의 가치가 1주당 100만원을 넘을 거라 평가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직 주식 모으기로 인한 이례적 급등 현상이었을 뿐이죠.
그래서 경영권 전쟁의 승기가 한쪽으로 쏠리고 나면 주가가 급락할 거란 전망에 무게가 실립니다. 공매도라도 살아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치닫지는 않았을 텐데 시장의 자정 기능이 작동하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유상증자 발표에 주가가 급락했는데도 여전히 100만원을 넘나드는 이 상황은 지극히 비정상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국민연금이 해야 할 의사결정은 단순명료힙니다. 보유 주식을 고가에 팔아 수익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국민연금 기금은 특정 기업의 특정 경영인이 가진 경영권을 방어하라고 쌓아둔 돈이 아닙니다. 국민의 노후를 책임질 돈이며, 이 돈이 너무 부족해 전전긍긍하는 중이다. 젊은이들에겐 “폰지사기”라는 말까지 듣고 있습니다. 정계와 학계가 모여 기금 고갈 시점을 늦추기 위해 머릴 맞대고 벌이는 논쟁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고요.
이런 판국에 국민연금을 운용하는 당사자라면 어떡해서든 운용수익을 불려 고갈 시점을 늦추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 합니다. 고려아연의 경우처럼 조 단위 수익을 낼 기회를 만나는 것이 흔치 않은데, 이런 상황에서 누구 편에 서겠다며 버티고 있는 겁니다. 그 의결권을 행사한 후엔 지금의 평가이익이 눈 녹듯 사라질 수 있는데.
우리는, 그리고 국민연금은, 고려아연을 현 경영진이 이끄는 것이 최선인지, 영풍에게 맡기는 것이 나은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국부 유출’은 그들의 수사일 뿐이고, 사모펀드가 기업을 인수해 경영 효율을 높인 사례도 많습니다.
밸류업, ESG 경영, 스튜어드십코드. 말만 앞세울 게 아니라, 진짜 집사로서의 본분을 되새기길 바랍니다. 가난한 살림을 맡은 집사의 배부른 소리가 가당키나 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