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12일(현지시각) 국방장관으로 피트 헤그세스를 발탁했다. 사진은 2016년 12월15일 헤그세스가 뉴욕 트럼프타워에서 트럼프 당선인과 회의에 참석하는 모습. (사진=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다시 당선됐습니다. '트럼프 2기'는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예고합니다. 우리 안보를 튼튼히 하기 위해 변화를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트럼프의 재당선은 미국 사회에서 우파 민중주의가 득세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미국 백인 노동자들은 고등학교만 나와도 열심히 일하면 가족을 건사하고 나름대로 풍요를 누렸습니다. 아메리칸 드림의 시대죠. 이제는 그게 어려워졌습니다. 제조업을 비롯한 미국 산업이 전반적으로 쇠퇴하면서 일자리가 확 줄었습니다. 물가는 치솟았죠. 금융과 부동산 투자, 군수산업을 기반으로 상위 1%가 부를 향유하는 반면에, 중하류층은 힘들어졌습니다. 쇠퇴한 옛 공업지역인 러스트 벨트를 비롯해 7개 경합 주를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가 석권하고 그 밖의 주에서도 공화당이 약진한 배경이 이것입니다.
트럼프는 이 모든 사정이 국내 차원에서는 '외부자' 즉 불법 이민자 때문에 생겼으며, 국외 차원에서는 기득권 엘리트들이 '세계 경찰' 노릇을 한다고 전쟁이나 벌이고 다녔지 미국민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우리한테는 트럼프 행정부의 안보 전략이 중요하죠. 트럼프의 전략은 외국 분쟁 개입을 최소화하고, 동맹국의 자체 방위 부담을 늘리되, 국방비를 증액하고 미국 군사력을 강화한다는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미국 전략과 크게 다릅니다. 공화당의 네오콘이나 민주당 행정부를 가릴 것 없이, 그동안 미국의 주류 외교안보 그룹은 민주주의 가치를 세계에 전파하겠다는 명분으로 해외 군사 개입을 확대해왔죠. 트럼프는 이들을 '전쟁광'이라고 일컬으며 배격하고 있습니다.
트럼프의 생각을 유추하는 데 도움이 될 자료가 있습니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존 F. 케네디 스쿨 스티븐 M. 월트 교수가 <미국 외교의 대전략>이란 책을 냈는데요. 월트 교수에 따르면 1992년 소련이 붕괴했을 때 승리를 거둔 미국은 자만심에 빠져 엉뚱한 대전략을 채택합니다. 소련과 동유럽 소련 위성 국가들이 무너졌으니 유럽에 대한 안보 위협은 줄었습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는 상식적으로 봐도 축소해도 되죠. 미국은 거꾸로 갔습니다. 나토 회원국을 동유럽 여러 나라로 차례차례 확대해갔죠. 이것을 나토 동진이라고 부릅니다. 그 결과 미국과 러시아 관계가 악화했으며 결국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에 이르렀죠.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리비아, 예멘 등 여러 곳에서 정권을 교체했습니다. 정권교체가 민주주의를 가져오지 않았죠.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미국이 전쟁에서 실패하고 철수했습니다. 미국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인권 가치를 전파한다고 주장했지만, 자유주의 가치를 확산시키지도 미국 패권을 유지하지도 못했다는 게 월트 교수의 결론입니다. 그러니 이제 여기저기 분쟁에 개입하지 말고 새로운 라이벌로 떠오른 중국을 견제하는 데 집중하자는 거죠. 월트 교수 한 사람이 아니라 미국 국제정치 학계의 양대 산맥인 '자유주의 패권론'과 '현실주의' 그룹 가운데 현실주의 학자들이 대개 이렇게 진단합니다.
월트 교수는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 외교정책 엘리트들이 한통속이 되어 '자유주의 패권' 전략을 추진해왔다고 진단합니다. 한 줌도 되지 않는 무리가 정부와 언론, 싱크탱크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는 의미에서 이들을 '블롭(Blob·물이나 잉크 한 방울)'이라고 일컬었는데요. 트럼프 1기 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협상을 훼방 놓았던 트럼프의 안보 참모들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번 대선 때 공화당 네오콘 논객들이 대거 트럼프를 비판하고 민주당으로 갈아탔습니다. 딕 체니 전 부통령이 대표적인 사례죠. 트럼프는 화가 났죠. 트럼프 1기 때 백악관과 외교안보 요직을 차지했던 엘리트들을 트럼프 진영이 배격하는 데 이런 배경도 있습니다.
트럼프가 요직 인선을 속속 발표하고 있는데요. 국방부 장관에 군 경력은 소령까지로 짧은 44살 <폭스뉴스> 진행자 출신 피트 헤그세스를 지명했습니다. 헤그세스는 트럼프 1기 때 북한과의 대화를 지지했습니다. 해외 미군 주둔 감축을 주장했죠.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트럼프·김정은 하노이 회담 당시 협상을 반대했던 것과 정반대였죠.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국무장관, 국가정보국장을 비롯한 다른 인선도 비슷합니다. 트럼프에 대한 충성심 위주로 인선한다고 언론이 해설하는데, 단순히 개인에 대한 충성심만이 아닙니다. 과거 몇십 년 미국 안보 전략 기조였던 자유주의 패권과 결별하겠다고 확실히 결심한 사람 위주로 추리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를 한국에서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미 대선이 끝난 뒤 국내 언론에 보수 논객들이 쓴 '트럼프 시대~' 기고를 죽 읽어봤습니다. 한·미·일 안보협력과 한미동맹은 여전히 굳건할 것이다, 대중국 견제를 위해 한국은 가치가 있다고 트럼프한테 설명하자, 미국 해군 함정 수리 용역을 적극적으로 따자, 일본과 힘을 합쳐 트럼프를 잘 설득하자 등등의 주장이 등장합니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페루를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15일(현지시간) 페루 리마 컨벤션센터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 한미일 정상회의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트럼프 2기에서는 '자유주의 가치 동맹' 개념이 바뀔 겁니다. 한·미 관계와 한반도 문제를 풀어가는 환경이 많이 바뀔 것으로 예상됩니다. 한국 보수 논객들의 기고를 보면 변화를 읽어내는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11월14일 외신 인터뷰에서 "러시아와 북한이 군사적 모험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동맹국 및 우호국과 공조해 우크라이나 지원 강화를 포함한 실효적 상응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트럼프가 취임하면 24시간 안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겠다고 하는 마당에, 한국이 우크라이나 지원 강화를 언급하는 것도 어색합니다.
한국 국익 차원에서 볼 때 트럼프 2기는 당혹스럽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트럼프 정부 1기 때 문재인 정부는 트럼프 정부와 케미(호흡)를 맞춰봤습니다. 최종 성과는 미흡했지만, 북·미 정상 대화를 주선했죠. 미국 쪽은 비용이 많이 든다면서 한·미 연합훈련 축소를 요구했죠. 그 상황에 맞춰 긴장이 고조되지 않도록 남북 관계를 원만하게 관리했습니다. 주한미군 방위비 협상에도 원칙과 전략을 갖고 대처했습니다.
우리 정부 당국자들이 '자유주의 가치 동맹' 시절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트럼프 2기 의미를 잘 파악하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맞춰 우리 안보 이익을 늘리고 비용을 줄일 방법이 얼마든지 있을 겁니다.
■필자 소개 / 박창식 / 언론인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광운대에서 언론학 석사와 박사를 했습니다. 한겨레신문 문화부장 정치부장 논설위원을 지내고 국방부 국방홍보원장으로 일했습니다. 국방 커뮤니케이션, 위기관리와 소통, 말과 글로 행복해지는 기술 등을 주제로 글을 쓰고 강의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