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환 대법관 퇴임사 전문

입력 : 2011-11-18 오전 11:58:07
[뉴스토마토 최기철기자]저는 오늘 6년간의 대법관 임기를 마치고 정든 법원을 떠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6년이라는 기간은 저에게는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쉽지는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2003년 지방법원 부장판사로서 대법관 선발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며 법원을 떠났던 제가 2년만에 대법관으로 법원에 복귀하는 일은 저로서는 무척 곤혹스럽고 민망한 일이었습니다.
한편으로 일부에서는 저의 대법관 임명과 관련하여 변화와 개혁, 소수와 진보 등의 의미를 부여하며 눈에 띄는 확연한 역할을 기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법관이라는 막중하고 영광된 소임을 맡기에는 저는 너무 부족하고 모자랐습니다. 능력과 자질에 비해 저는 너무 과분한 자리에 와 있었으며, 저의 그릇은 이미 넘쳐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6년간 저 나름대로는 애를 써 왔지만 제가 이루어낸 소출은 작고 초라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고통스럽기도 하였고, 6년 내내 자괴심과 부채감이 저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 왔습니다.
 
작고 초라하나마 제가 빚어낸 소출이 다소라도 있다면 그것은 선후배 동료 법관들과 법원 안팎에서 간절한 바램으로 기원해 주신 분들의 애정어린 도움 덕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와 사죄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음지에서 묵묵히 일해 오신 법원 직원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제 저는 잠시 빌려 앉았던 과분한 자리를 떠나 작고 소박한 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떠나는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기에 적절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직도 저의 마음속에 가득 남아 있는 법원에 대한 애정을 담아 한두 가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법원은 그 시대의 고민과 아픔을 모두 품어 안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우려내는 기관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다수의 이익과 행복을 좇아 결론 내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 과정에서 소수자, 소외된 자, 약자의 행복이 그 대가로 지불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수자의 이익을 보호해 주면서도 동시에 소수자가 무엇을 아파하는지, 그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를 함께 가슴아파하며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지 못한다면, 법원은 다수자들의, 그들만의 법원에 머무르게 되고, 그 바깥으로 밀려난 자들은 버려진 사람으로 남아 하소연할 데 없는 아픔을 품고 잊혀진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소수자, 약자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는 소수자, 약자의 처지에 공감을 하는 분들이 법관 속에 포함되어 있어야 하고, 특히 최고법원을 구성하는 대법관은 반드시 다양한 가치와 입장을 대변하는 분들로 다양하게 구성되어야 함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또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법관의 자율성입니다. 재판의 독립, 법관의 독립은 사법권의 생명과 같습니다. 법관이 독립하여 재판하기 위해서는 법관에게 최대한의 자율성이 주어져야 합니다.
 
다수나 강자의 입맛에 맞게 통제되는 법관, 순치되는 법관으로는 다수와 소수, 강자와 약자의 이익을 두루 살피고 다양한 가치관에 따라 창조적인 법해석을 통한 사회 발전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법관의 자율은 그냥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법관을 통제하고 자기 편으로 길들이려는 욕구는 한시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결국 법관의 자율은 법관 스스로가 싸워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고결함, 끊임없는 자기성찰, 한결같은 진정성, 그리고 법관을 길들이려는 시도에 맞서는 담대한 용기, 이것들만이 여러분들의 자율성과 재판의 독립을 지켜 줄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덧붙여 법원이 다수의 뜻에 순치된 법관들로만 구성되는 경우에는 그 사회는 사법부가 존재하지 않는 비극적인 사회로 전락되고 말 것이라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이제 저는 물러갑니다.
남아 계신 여러 분들에게 제 꿈을 넘겨드리고 갑니다. 우리 법원이, 법원 안에서 일하는 여러분들이, 그리고 법원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모든 국민들이 모두 행복해 지는 그날을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1. 11. 18.
 
대법관 박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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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