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박정희와 김일성, 간도에 버려진 독립군 후손들

입력 : 2012-10-17 오후 6:13:54
[뉴스토마토 권순욱기자] 10월 17일. 유신 40주년이다. 무슨 기념할 날이라고 40주년이라고 표현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40년이 되었다.
 
김일성의 길을 걸어간 박정희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유신헌법은 남과 북이 분단된 상황을 이용한 권력자의 장기집권계획이다. 국민의 눈과 귀와 입을 모두 봉해버리는 극단적으로 반민주주의적이고, 파쇼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사고의 결정체다.
 
북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의 김일성 수령도 북조선 인민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는 명분으로 전체주의 독재국가를 건설했듯이, 남한의 박정희도 "내가 너희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해줄테니 입 닥치고 내 말만 믿고 따르라"는 것을 무려 '헌법'이라는 것에 규정한 것이다.
 
꼴에 '민주주의'는 걸치고 가야 행세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민주주의'는 빠트리지 않았다. 배웠다는 헌법 학자라는 자들은 유신헌법에 '한국형 민주주의'라는 그럴싸한 포장까지 해주었다.
 
북조선인민공화국은 '북한식 민주주의'라고 못할 것 없다. 하기사 황장엽이라는 주체사상의 창시자도 죽을 때까지 자신이 세운 주체사상이라는 이념을 포기하지 않고, 주체사상을 관철하면 지상낙원이 도래할 것이라고 믿고 저 세상으로 떠났으니 황장엽이 만든 이념으로 충만한 북한이라고 할 말이 없는 것도 아니다.
 
참으로 많은 생각이 교차하는 날이다.
 
아직도 유신헌법의 유령이 배회하는 대한민국
 
수많은 민주주의자들의 피와 죽음으로 겨우 여기까지 온 민주주의조차도 산업화를 이룬 박정희 덕분이라는 궤변도 접해야 하는 오늘날 한국의 현실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일본 덕분에 우리나라가 근대화되었다는 뉴라이트와 일맥상통하는 논리구조다.
 
분단이라는 상황을 이용해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세력을 모조리 숙청한 김일성이 세운 유일지도체제의 북한.
 
그리고 역시 분단을 이용해 반공 하나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며 반대의견을 압살한 박정희 유일지도체제의 남한.
 
돌아보건대 유신헌법은 우리 스스로 북한의 전체주의 체제를 비판할 수 없게 만든 부끄러운 자화상에 불과하다. 유신체제의 종식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70년대는 그야말로 남북한 공히 서로가 서로를 의지해 독재자를, 그리고 전체주의를 정당화하는 역사였다. 이를 가리켜 우리는 '적대적 공존'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대한민국 정치의 폐해라고 일컬어지는 지역주의 정당 역시 적대적 공존에 의지하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다. 영남의 새누리당이 존재해야 호남의 민주통합당이 존재할 수 있듯이, 민주통합당의 존재로 인해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새누리당처럼 서로가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하지만, 그 죽이고 싶은 존재 덕분에 숨통을 이어가는 것이 오늘날 한국의 거대 양당이다.
 
논리로 안되면 꺼내드는 종북(從北)이니 용공(容共)이니 하는 용어도 적대적 공존의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토론을 질식시키고, 대화를 차단하는 전형적인 수법이 북한타령이다. 북한이라는 존재가 없으면 도대체 무슨 논리로 자신의 존재와 논리를 증명할지 알 수 없는 정치인, 언론, 지식인이 판을 치고 있는 게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걸핏하면 종북이니 용공이니 하는 표현을 쓰며 상대방에게 '나쁜 주홍글씨'를 새기는 데 애쓰는 사람들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체제보다는 북한같은 전체주의체제에 잘 적응하며 살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박정희는 차베스의 스승이다
 
유신 40주년(?)을 맞이하는 심경은 착잡하다. 아직 그 역사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신체제는 오직 반북, 반공 말고는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할 수 없었던 박정희가, 비참한 말로를 겪어야 했던 수많은 전 세계 독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종신집권의 길을 열었던 헌법이다.
 
박정희는 차베스의 스승이고, 카다피의 스승이기도 하고, 피노체트와는 절친이기도 하다.
 
피노체트는 박정희보다는 운이 더 좋은 사람에 불과하다. 17년 독재 끝에 망명을 떠나 영국 대처 정부의 비호 아래 감옥행을 피하고, 칠레에 친미정부가 들어서자 보란듯이 귀국해서 하늘이 준 명을 다 살다갔으니 말이다.
 
유신체제 선포 40년을 앞두고 얼마전 독립운동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중국 연변을 다녀왔다.
 
두만강과 압록강 주변을 필두로 동북3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중국 길림성, 흑룡강성, 요녕성에는 아직도 200만명에 달하는 조선족이 살고 있다.
 
조선족?
 
미국과 일본에 살고 있는 재미동포와 재일동포를 우리는 조선족이라 칭하지 않는다. 그런데 재중동포는 조선족이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옛 소련땅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고려인(까레이스키)이라고 칭한다.
 
'똥포'로 멸시받는 독립군의 후예 조선족
 
동포라 불리우지 못하는 그들은 자신들의 원래 조국에서 잊혀진 존재들이었다. 남과 북을 가리지 않고 외면당했다.
 
오직 김일성의 역사만 존재하는 북조선 땅에 조선족의 선조들, 독립운동의 선구자들이 설 자리는 없다. 아니 김일성은 더 나아가 자신의 유일권력을 위해 그 자랑스러운 선조들을 모조리 몰살했다.
 
남한 땅에서는 나라를 팔아먹고 일제에 빌붙어 살던 기회주의자들이 이승만의 반민특위 해체에 힘입어 '반공' 하나에 기대어 마치 '애국주의자'인냥 설쳤다. 나라 팔아먹은 적이 없었던 듯이, 독립지사들을 때려잡은 적이 없었던 듯이, 자기들만이 나라를 사랑하는냥 설쳤던 역사가 불과 몇십년전 이야기다. 이승만을 반대하면 친북이고, 박정희를 반대하면 친북이고 종북이다. 전두환을 반대해도, 심지어 이명박을 반대해도 친북이니 종북이니로 몰아간다.
 
유신체제를 비판하고 저항했던 행위조차도 종북이라고 몰아간다.
 
조금이라도 사회주의 사상이나 중국 공산당과 연관된 독립운동가들은 역사책에서 실리지 않았다. 가르치지 않았다. 반쪽짜리 역사를 역사라고 가르치며, 더 나아가 일본 덕분에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는 일본 우익의 주장이 뉴라이트라는 이름으로 주장되고, 역사책에 오르려 한다.
 
그리고 만주 벌판의 말달리던 선구자는 역사에서 지워졌다. 그 후손들은 '똥포' 취급을 받고 있다.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일송정에서 바라본 소나무와 용정(龍井)시. 용정시에는 헤이그 밀사로 파견된 이상설 선생이 세운 근대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의 명맥을 잇고 있는 대성중학교가 있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탄압했던 일본영사관과 지하감옥이 있다. 용정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독립운동가들이 속속 모여들어 주변에 수많은 교육기관을 설립한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다.
 
재미동포는 미국이라는 강대국에 산다는 이유로 '동포'로 높게 받들었고, 재일동포는 돈이 많아서 '돈포'로 받들었지만, 가난하고 못배운 독립군의 후예들인 중국과 러시아, 중앙아시아 동포는 '똥포' 취급을 받았다.
 
조국 땅에 발 딛기 위해서는 취업비자를 받아야 하는 차별을 당했다.
 
그들의 삶은 고단하다. 조선족 어린이들의 70~80%가 결손가정이라고 한다. 조부모나 친지, 그리고 고아원에서 자라는 어린이들 비율이 그 정도로 높다는 것이다.
 
중국의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농촌에 기반을 둔 조선족이 직격탄을 맞고 있는 것이다. 북경으로, 상해로, 한국으로 돈을 벌기 위해 젊은 사람들이 떠나고 있다. 자식들을 함께 데리고 갈 수 있는 처지가 아니어서 맡겨 놓고 가는 것이다.
 
그 어린이들의 심리적 불안은 당연한 것이다. 주기적으로 심리상담을 한다고는 하지만 어디 부모의 빈 자리가 상담으로 메워질 성격인가?
 
작지만 의미있는 첫 발걸음
 
이에 일부 뜻있는 사람들이 조선족 어린이들이 다니는 민족학교에 도서관을 만들어주는 사업을 시작했다.
 
지난 11일 길림성 화룡시에 소재한 조선족 민족학교인 신동소학교에서는 도서관 개관식이 열렸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공모를 한 결과 '네모상자'로 명명된 도서관은 100년전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선구자들이 곳곳에 학교를 지었던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전투 현장이 있는 화룡(和龍)시 신동소학교는 조선민족학교다. 지난 11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와 한겨레통일재단, 그리고 뉴스토마토의 모회사인 이토마토가 힘을 모아 도서관을 개관했다. 도서관 설립 사업은 앞으로 동북3성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전개될 에정이다. 신동소학교는 1921년에 설립되어 현재까지 민족학교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북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의 김일성이 외면했던, 민주주의공화국 대한민국이 외면했던 독립군들의 후예들에게 조금이라도 그 빚을 갚기 위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유신헌법이 만들어진지 40년.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일본 황제에게 충성의 혈서를 쓰고 독립군을 토벌하던 만주국의 장교였던, 그리고 남조선노동당의 핵심으로 활약하다 동료들을 고발하고 살아남아 반공을 죽도록 사랑했던 박정희가 외면했던 그들을 우리는 다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유신체제 40년을 맞는 오늘 김일성 가문을 위한 전체주의 국가 북조선인민공화국과 반쪽짜리 자유민주주의국가 대한민국에 의해 쓰여진 반쪽짜리 역사가 아닌, 온전한 대한민국 역사의 원형이 살아있는 동북3성을 다시 한번 기억한다.
 
온전한 대한민국 역사의 복원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사진은 중국 도문시에서 바라본 두만강이다. 두만강변에는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작은 섬들이 많이 있는데, 이를 가리켜 '사이섬'이라고 불렀다. 사이섬을 한자로 표기하면 간도(間島)다. 구한말 관리들의 가렴주구로 먹고 사는 것조차 힘들었던 조선 백성들은 조선과 청나라의 감시가 모두 미치지 않는 간도에 들어가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 걸리면 월경죄(越境罪)로 목이 잘리었다. 당시 청나라는 북경에 도읍을 정한 뒤 백두산 일대를 자신들의 성지로 선포하고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 출입을 금하는 봉금령(封禁令)을 내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조선인들이 하나 둘 두만강의 섬으로 들어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으며, 이후 조선인들이 개척한 땅을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다. 백두산 윗쪽이 북간도, 아랫쪽이 서간도로 불리었으며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병탄된 이후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청나라의 주권이 미치는 간도로 넘어와 교육기관을 설립하며 독립운동 기지로 활용하게 된다. 하지만 이 마저도 중국 공산당과의 싸움에 몰두하던 국민당의 묵인 아래 일본에 의해 점령되었고 만주국이 세워졌다. 유신체제를 도모했던 박정희는 일본이 세운 만주국에서 혈서를 쓰고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가 되었다. 김일성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때려잡고 북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라는 이름의 김일성 왕조를 수립했다.
 
정치사회부장 권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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