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기철기자] '이상한 결론'으로 일단락 됐던 '국정원 대선개입' 수사가 새 국면을 맞았다.
참여연대는 지난 20일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의 수사 은폐 및 선거법위반 행위 등에 공모한 혐의로 경찰관계자 15명을 검찰에 고발했다.
참여연대측은 이날 서울중앙지검에 고발장을 접수하기 전 "당시 경찰수뇌부가 단순히 김 전 청장의 지시에 따랐다는 이유로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경찰 윗선의 수사개입이나 방해는 계속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참여연대 관계자들이 21일 '국정원 대선개입'사건과 관련해 경찰 수뇌부들을 선거법위반 혐의 등으로 고발하기 위해 서울중앙지검 청사로 들어서고 있다.(사진제공=참여연대)
◇경찰 수뇌부 고발, 수사결과 발표때 이미 예견
이들 경찰 수뇌부에 대한 고발은 이미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 때부터 예견되어 있었다.
특히 사건 당시 김 전 청장과 함께 움직였던 서울지방경찰청 수사부장 최모씨와 수사과장 이모씨, 수사2계장 김모씨에 대해서는 이미 검찰도 혐의를 인정한 바 있다.
최씨 등은 김 전 청장의 지시를 받고 수서경찰서 수사팀에 디지털분석 등 증거분석결과를 대선일 직전까지 넘겨주지 않았다. 증거분석 결과물의 회신을 거부하고 고의로 지연시킴으로써 수서경찰서 수사팀의 수사 진행을 방해했다.
대선후보 마지막 TV토론 직후 발표된 '중간수사결과 발표'와 이튿날 정식 발표의 초안도 이들 작품이다.
최씨 등은 전 김 전 청장으로부터 "국가정보원의 개입 의혹을 해소해주는 발표 방안을 강구하라"는 지시를 받고 '하드디스크 저장 정보를 수십 개의 키워드로 검색하였으나 2012. 10. 1. 이후 문재인·박근혜 대선 후보에 대한 비방·지지 게시글이나 댓글을 게재한 사실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중간수사결과 발표 문구를 만들었다.
◇전 서울경찰청 수사부장 등 "조작해도 국민 모를 것"
검찰은 "최씨 등은 이렇게 하면 일단 대선이 임박한 시기에 디지털포렌식을 잘 모르는 일반 국민들이 국가정보원 직원들이 조직적인 사이버 여론 조작을 하지 않았고 민주당의 의혹 제기는 근거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함으로써 국가정보원의 개입 의혹을 일응 해소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최씨 등이 김 전 청장의 지시를 받기는 했지만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선거에 개입했다는 점을 검찰도 인정한 것이다.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 등 일부 수뇌부가 대선 개입 및 수사를 은폐·축소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일선 경찰들의 사과가 이어졌다.(사진=김학구 경사 페이스북)
그러나 검찰은 이들에 대해서 아무런 처분도 하지 않았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불구속기소하면서 직간접적으로 정치나 선거에 개입한 이 모 전 국정원 3차장, 민 모 전 심리전단장, 김 모 씨 등 국정원 직원들에 대해 전원 기소 유예한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이번 사건에서 사법처리된 경찰관계자는 김 전 청장과 사이버범죄수사대 증거분석팀장 박모씨 뿐이다. 박씨는 검찰의 서울지방경찰청 압수수색 전 국정원 직원들의 댓글작업 사실을 확인한 증거자료를 삭제해 증거인멸 혐의 등으로 불구속 기소됐다.
서울지방경찰청 수사부 간부들을 아무런 처분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검찰 관계자는 "국정원의 경우와 같이 판단했다"고 밝혔다.
◇검찰 "상명하복 관계의 조직 특성 감안"
검찰은 앞선 수사결과 발표에서 원 전 원장만을 기소하고 나머지 관련자들을 기소하지 않은 것에 대해 "원장의 지시에 따른 범행으로서 상명하복 관계의 조직 특성을 감안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검찰의 이 같은 설명은 그동안의 대법원 판단과 배치된다. 대법원은 1999년 선거에 개입해 기소된 권영해 전 국가안전기획부장 사건을 판단하면서 권 전 부장의 지시에 따른 국정원 직원 10여명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안기부가 엄격한 상명하복의 관계에 있는 조직이더라도, 안기부 직원의 정치관여가 법률로 엄격히 금지돼 있다"며 "피고인들의 경력 등에 비춰보면 상급자의 의도가 위법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검찰 관계자는 또 "수사부장 최씨 등의 행위가 죄가 안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를 처벌할 것인가는 우리가 판단하는 것"이라며 "수사부장 등은 고발되지 않은 사람들로 우리가 특별한 처분을 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고도 해명했다.
그러나 이 또한 검찰 스스로가 국정원 직원들을 사법처리한 것과 모순된다. 검찰은 고발되지 않았으나 수사단계에서 혐의가 밝혀진 국정원 직원들을 피의자 신분으로 수사하고 입건유예했다.
◇검찰 "고발 대상 아니었다"..인지수사 외면 논란
무엇보다도 고발이 되지 않았더라도 수사단계에서 인지된 범죄인에 대해서는 끝까지 수사해서 진실을 규명하고 사법처리하는 검찰의 임무를 다 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법률 전문가들도 이 같은 검찰의 해명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형사법을 많이 다루고 있는 판사출신의 한 중견 변호사는 "국정원이나 경찰 등 상명하복 관계의 조직 특성 고려해서 상급자만을 처벌한다는 것은 대법원 판례와 법리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중견의 또 다른 형사 전문 변호사 역시 "검찰의 역할이 감춰진 진실을 캐내고 숨어 있는 범죄자들을 찾아내 법정에 세우는 것"이라며 "고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판단해서 사법처리 하지 않았다면 검찰은 국민이 고발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냐"라고 비판했다.
검찰의 개운치 않은 처분과 해명에 일각에서는 수사상 전략적인 합의가 있었지 않았겠느냐는 관측도 나온다.
◇이진한 서울중앙지검 2차장이 지난 14일 '국정원 대선개입'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사진=전재욱 기자)
◇수사상 전략적 합의 있었나?
국정원이나 검찰 모두 국가정보기관 내지는 수사기관으로 수사가 쉽지 않은 곳이다. 사안도 극히 민감한 '대선 개입'이다.
시간은 촉박했고 정치권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압박을 가했다. 막판에는 황교안 법무부장관의 수사권지휘 문제와 수사팀 내분설까지 터지면서 수사 진행이 큰 벽에 부딪혔다.
진퇴양난(進退兩難)의 검찰이 원 전 원장과 김 전 청장을 확실히 법정에 세우기 위해 재량 안에서 최소한의 처벌수위를 유지하기로 하고 피의자들로부터 협조를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설령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이번 만큼은 경찰은 물론 국정원 관련자들도 빠져나가기 쉽지 않을 전망이다. 서울지방경찰청 수뇌부 인사들은 물론 기소유예 내지는 입건유예 된 국정원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재정신청 등 재수사 요구가 빗발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역시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가 가능하다. 형사소송법상 공범이 기소된 경우 다른 공범에 대한 공소시효는 정지된다. 이번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의 큰 두 축인 원 전 원장과 김 전 청장이 지난 14일 기소됐으므로 그날부터 이 사건의 공소시효는 정지됐다.
국민들의 고발이라는 '협조'로 다시 한 번 수사기회를 잡게 된 검찰이 이번 사건을 국민의 눈높이에서 법과 원칙에 따라 투명하고 공명정대하게 처리 할지 주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