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예술의전당이 극작가 게오르그 뷔히너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만든 연극 <당통의 죽음>이 CJ토월극장에서 상연 중이다. 이 작품은 루마니아 연출가 가보 톰파와 작가 안드라스 비스키, 배우 박지일과 윤상화, 소리꾼 이자람 등 화려한 제작진과 배우를 기용하면서 일찌감치 올 하반기 주목해야 할 작품으로 떠올랐다. 원작의 현대화를 표방한 이 작품은 기대했던 바대로 세련된 무대와 연출력이 눈길을 끈다. 그러나 각색한 극의 내용이 한국의 상황과 거리감을 좁히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원작은 18세기 프랑스혁명이 민중혁명의 국면에 접어든 상황에서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혁명을 압도하는 상황을 다룬다. 이때 벌어지는 당통과 로베스피에르의 대립이 극의 주된 내용이다. 당통은 관용과 평화를 주장하는 인물로, 로베스피에르가 혁명의 이름으로 혁명을 파괴하고 독재의 길로 가고 있다고 공격한다.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의 부정적인 점을 알면서도 중산계급의 우상인 당통 때문에 혁명이 끝날 것을 두려워해 당통을 반혁명자로 처형할 것을 결심한다. 즉, 로베스피에르로 대변되는 급진 좌파와 당통으로 대변되는 온건 좌파의 첨예한 대립이 극의 주요 골조인 셈이다.
(사진제공=예술의전당)
21세기 한국의 무대로 옮겨진 극은 원작 속 18세기 프랑스혁명과의 시공간적 격차를 감안해 현대적으로 재구성됐다. 투명한 가벽과 바닥으로 구성된 무대는 최첨단이라는 단어를 저절로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세련되게 꾸며졌다. 또 무대의 앞뒤와 중간 부분에 설치된 승강무대장치는 무대를 다이내믹하게 움직이게 하는 동시에, 이데올로기가 마치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처럼 작용해 계급을 나눈다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군중을 대변하는 역할을 혼자 도맡은 이자람도 극의 현대적 의미를 풍성하게 한다. 이자람은 자신의 장기인 1인 다역을 통해 시공간을 초월한 사회의 밑바닥 민심을 대변하며 극의 공연적 재미를 높인다.
그러나 외국 연출가라는 한계 때문인지 극이 현재 한국의 정치적, 사회적 딜레마를 연상시키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극의 주요한 흐름을 담당하는 당통과 로베스피에르 사이의 대립은 혁명과 이상주의, 이데올로기로 인해 희생되는 개인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로 이끌기보다는 공포정치와 인간 본성 간 대립으로 다소 단순하게 그려졌다.
무엇보다도 혁명 이후 좌파 내 첨예한 분열을 그리는 원작과 달리 이번 공연에서는 당통과 로베스피에르 간 대립의 출발점이 명확하지 않다. 극이 현대화되면서 프랑스혁명의 역사적 무게는 다소 덜어냈지만 그것을 대체할 극의 현대적 상황이 명확하게 설정되지 않았다. 훌륭한 배우들이 총동원 됐음에도 한계가 느껴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로베스피에르라는 인물에 대해 한국 관객을 고려해 설정한 점이 무엇인지 구체적이지 않아 아쉽다. 급진좌파를 대변하는 로베스피에르는 도덕성을 강조하는 공포정치의 주체라는 점이 부각됐는데, 이 점은 급진좌파의 존재감이 미미한 현재 우리 사회의 상황과는 다소 충돌하는 지점이기 때문에 원작의 현대화를 위해서는 이를 보완할 세심한 설정이 필요하다. 여기에다 전반적으로 세련된 의상 탓에 로베스피에르의 모습은 급진좌파라기 보다는 흡사 우파처럼 비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혁명을 사수하려는 로베스피에르의 모습에 대한 울림이 줄어들었다. 만약 우리 사회의 상황에 맞게 원작을 더 적극적으로 개작하거나 아니면 차라리 18세기 프랑스혁명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하는 대신 당통과 로베스피에르 사이의 첨예한 정치적 논쟁에 집중했다면 적어도 인물의 이해에 대한 혼란이 덜했지 않았을까 싶다.
마이크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사가 잘 안 들린 것 또한 아쉬운 지점이다. 배우의 소리가 묻히는 문제는 토월극장 시절부터 이 공간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됐는데 CJ토월극장으로 재개관하는 과정에서 대대적인 공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은 듯하다. 원작 게오르그 뷔히너, 연출 가보 톰파, 각색 안드라스 비스키, 무대디자인 안드레이 보트, 출연 박지일, 윤상화, 이자람, 문형주, 최지영, 서광일, 임진웅, 김준호, 조영준, 염순식, 양원석, 조장연, 이후성, 협력연출 이곤, 조명 박남석, 영상 박준, 작창 이자람, 번역 김철리, 작곡 이지혜, 음향 피정훈, 의상 한소희, 협력 무대디자인 김가은, 17일까지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